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138화

새벽의 냉기가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하윤의 뺨을 스쳤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희뿌연 안개에 갇혀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은 이미 녹아내려 질척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 위로 다시금 하얗고 작은 눈발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새하얀 붕대를 감듯이, 세상은 그렇게 새로운 설렘과 냉혹한 현실을 동시에 덧입고 있었다.

하윤은 낡은 창틀에 기댄 채 가슴께를 감싸 쥐었다. 심장이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메마르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1138번째의 겨울. 수많은 계절이 바뀌었지만, ‘그날’의 약속은 여전히 그녀의 삶을 꿰뚫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 같았다. 그 약속은 그녀의 모든 선택과 모든 아픔의 근원이자,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문득, 등 뒤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지훈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하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떨림이 하윤의 차가운 심장을 조금이나마 녹이는 듯했다.

첫 번째 눈발

“또 잠 못 들었어?” 지훈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처럼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하윤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깊은 연민이 스며 있었다.

하윤은 고개를 젓는 대신, 그의 팔에 기대어 창밖을 응시했다. “눈이 와. 다시 시작되려는 건가 봐.”

지훈은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아니. 끝내려는 거야. 우리가.”

그의 말에 하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싸움을 함께 해왔다.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 약속으로부터 하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의 삶은 마치 얼음 위에 위태롭게 쌓아 올린 성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로 간신히 버텨왔던 시간들.

“정원이… 미령에게 또 연락했대.” 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 이름이 언급되자 하윤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정원. 그녀의 이름은 마치 해묵은 아픔의 서막처럼 항상 차가운 공기를 불러왔다.

하윤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 하얀 눈밭 위에서 환하게 웃던 어린 정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자신과,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미령의 모습까지도. 십수 년 전,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미령은 뭐라고 하는데?” 하윤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속에 숨겨진 절박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여전히 그 약속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어. 정원의 안녕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지훈은 하윤을 마주 보게 하고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늘 그랬듯이 따뜻하고 견고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하윤아. 네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정원에게도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다른 길? 지훈아, 우리가 약속했잖아. 정원은 우리의 모든 것이었어.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겨울 호수처럼 깊고 슬펐다. 그녀는 그 약속이 자신을 옥죄는 사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놓을 수 없었다.

차가운 진실의 그림자

그때, 현관문에서 희미한 벨 소리가 울렸다. 이 이른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지훈과 하윤의 얼굴에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훈은 하윤의 어깨를 다시 한번 단단히 쥐어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미령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겨울 바람을 직접 몰고 온 사람처럼, 그녀의 존재는 방 안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했네요.” 미령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하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당신들이 이렇게 한가하게 눈 구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어서 말이죠.”

“무슨 일이야, 미령아.” 지훈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하윤 앞에 서서 그녀를 가로막는 자세를 취했다.

미령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이냐고요? 정원 때문이에요. 정원이 또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고, 이번에는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우리가 그녀를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했어요.”

하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어떻게 정원을 버릴 수가 있어?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잖아!”

“모든 것? 하윤, 당신의 ‘모든 것’은 정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미령의 목소리가 점차 싸늘해졌다. 그녀는 가죽 지갑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았다. “정원이 보낸 거예요. 그리고… 이 안에 담긴 내용은, 당신들이 결코 원하지 않을 진실을 담고 있죠.”

지훈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투 안에는 정원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편지 한 장과,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정원과,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낯선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겨 있었다.

하윤은 지훈의 옆으로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그 남자는 바로… 정원의 친아버지였다. 오랫동안 죽었다고, 혹은 사라졌다고 믿었던.

“이게… 무슨…” 하윤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갈라졌다.

미령은 비릿하게 웃었다. “놀랐어요? 정원은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왜 우리가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고, 우리가 그녀를 가두려 했는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부서지는 약속의 파편

“우리는 정원을 위해서였어. 그 남자는 정원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지훈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죠, 지훈 씨. 정원은 자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는 아이예요. 그리고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당신들이 숨겨왔던 진실, 그리고 그 약속이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 미령은 하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당신은 정원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의 그 ‘모든 것’은 결국 정원을 속박하는 족쇄가 되었어요. 이제 선택해야 해요, 하윤. 그 약속을 깨고 자유로워질 것인지, 아니면 정원의 분노와 마주할 것인지.”

하윤은 손에 든 사진을 꽉 쥐었다. 사진 속 정원의 환한 미소가 왜곡되어 보였다. 그녀는 정원이 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왔다. 그 남자는 어둠이었고, 정원을 위험에 빠뜨릴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정원은 그 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차가운 눈밭 위, 어린 정원의 눈물 젖은 얼굴.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손을 맞잡으며 했던 맹세. ‘정원아, 걱정 마. 이모가 널 평생 지켜줄 거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널 행복하게 해줄게. 약속해.’

그 맹세가 지금, 이토록 잔인한 칼날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흔들리는 맹세

“정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하윤은 미령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힘겹게 흘러나왔다.

미령은 비웃듯이 답했다.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이미 당신들을 피해 움직이고 있어요. 당신들이 숨겨왔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어쩌면… 당신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주 멀리 떠나버릴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하윤의 심장을 찔렀다. 정원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는 정원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원이 자신을 오해하고 증오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지훈은 하윤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윤아, 생각해봐. 정원이가 그의 아버지와 만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우리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던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나?”

“알아… 알지만…” 하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미령과 지훈 사이를 오가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약속은 정원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 약속 때문에 정원이 상처받고 있었다.

미령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듯 말했다. “정원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해요. 당신들이 그동안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어요. 진실을 밝히든, 아니면 정원을 영원히 잃든…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에요.”

창밖으로는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하얀 눈꽃들이 창문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하윤의 마음속에서 약속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마치 겨울 밤의 악몽처럼 선명하게 그녀를 노려보는 듯했다. 정원을 지키기 위해 했던 약속이, 이제 정원을 잃게 만들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윤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거짓된 보호의 약속 뒤에 숨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걸고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이,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결심한 듯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비록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전에 없던 단단한 결의를 담고 있었다. “정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해. 내가 직접 이야기할 거야. 모든 진실을.”

지훈은 놀란 눈으로 하윤을 바라보았다. 미령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차가운 결심 뒤에는 어떤 폭풍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단지, 이 겨울이 끝나기 전,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만이 차가운 공기 속을 떠다닐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