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의 그림자가 완전히 물러간 자리에는, 연둣빛 새싹과 싱그러운 꽃망울이 그득한 봄의 숨결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밤낮을 그리움과 회한 속에 잠겨 있던 이안의 마음에도, 어느새 창문 너머로 스며든 따스한 바람 한 줄기가 작은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고요한 서재, 햇살이 바닥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오래된 책들의 묵향과 새롭게 피어나는 꽃향기가 묘하게 뒤섞여, 이안의 복잡한 감정선을 더욱 흐트러뜨렸다. 그는 낡은 지도 위에 얹혀진 손을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지도의 한 귀퉁이, 점선으로 표시된 ‘사라진 섬’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갇혀버린 현우의 그림자는, 지난 천여 화가 넘는 시간 동안 이안의 심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죄책감이자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창문이 스윽, 하고 아주 미세하게 열리며 한 줄기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바람은 차갑지 않았으나, 이안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함께 싣고 온 듯했다. 창틀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상자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안은 놀라 상자를 주워 들었다. 먼지가 앉은 낡은 상자. 과거 현우가 늘 곁에 두고 아끼던 물건이었다. 이안은 상자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지금 이 순간, 이 상자가 바람에 의해 떨어진 걸까.
상자 속에는 얇은 양피지 한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 황량한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메마른 현우의 글씨체가, 여전히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글씨는 마지막으로 현우가 사라지기 전, 모두가 그의 죽음을 확신했던 바로 그날에 쓰인 것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이안은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이안, 그리고 수련에게.」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혹은, 세상에 있어도 세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우는 늘 그런 식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들로 주변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달랐다. 행간마다 절박한 진심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더듬으며 이안은 현우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 진실을 찾아 ‘시간의 숲’으로 간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끝날 그곳으로. 너희가 알던 비극은 사실 거대한 그림자의 일부일 뿐이다. 진짜 그림자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시간의 숲’이라니. 그곳은 고대의 기록에만 존재하는, 전설 속의 장소였다. 아무도 그곳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현우의 실종과 함께 그저 미쳐버린 자의 망상쯤으로 치부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현우는 그곳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지막 진실’과 함께.
「나를 찾지 마라. 아니, 찾으려거든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하고 와라. 숲의 입구에 놓인 고대 수호석의 봉인을 해제할 열쇠는, 너희의 가장 깊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오직 봄바람이 전하는 소식과 함께 깨어날 것이다.」
봄바람이 전하는 소식. 이안은 눈앞의 양피지와 방금 창문을 열고 들어온 바람을 번갈아 보았다. 우연일까. 아니, 현우는 이런 우연을 믿는 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계획하는 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자가, 이 양피지가, 그리고 이 봄바람이… 현우가 남긴 ‘소식’이라는 말인가? 현우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의 의지가, 그의 영혼이 이 메시지를 통해 이안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서재 문이 조용히 열리고 수련이 들어섰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옅은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현우가 즐겨 마시던 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이안의 불안한 기색을 읽었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안…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요.”
이안은 천천히 몸을 돌려 수련을 마주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양피지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련의 시선이 양피지 위에 닿았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글씨체. 그녀의 가슴에도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통증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양피지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수련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현우 오빠… 현우 오빠가 살아있다고요? 아니, 이건…”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이제야… 왜 이제야 이런 말을 남긴 거예요?”
이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련아… 이게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하라’고 했어. 그리고 ‘열쇠는 우리의 가장 깊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고.”
수련은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가장 깊은 기억이라니… 우린 그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잖아요. 오빠가 사라지던 그 비극적인 날, 우리가 얼마나 애썼는지… 얼마나 절망했는지…”
“하지만 현우는 ‘그 비극은 거대한 그림자의 일부일 뿐’이라고 했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야.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감히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이안의 목소리에도 결연한 의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밤을 현우를 찾아 헤맸던 지난날의 고통이, 이제는 새로운 희망과 함께 거대한 의지로 변하고 있었다.
“‘봄바람이 전하는 소식과 함께 깨어날 것이다’…” 수련은 다시 글귀를 읊조렸다. “정말… 이 바람이 오빠의 메시지를 가져온 걸까요? 오빠가 우리에게 기회를 준 걸까요?”
이안은 수련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숨겨왔던 두려움과 희망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현우의 메시지는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멈춰 있던 두 사람의 운명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파도였다. 잃어버린 현우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과, 그와 동시에 마주해야 할 알 수 없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두 사람의 가슴을 동시에 짓눌렀다.
“우리가 찾아야 해, 수련아. 현우를… 그리고 그 진실을.” 이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결심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현우에게 진 마지막 빚을 갚을 기회일지도 몰라.”
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 미약하지만 단단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천여 화가 넘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현우가 남긴 봄바람의 소식은 그 모든 절망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서재 창밖에서는 따스한 햇살 아래, 연둣빛 새싹들이 희망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시간의 숲’으로 향해야 했다. 그 숲이 어떤 진실을 품고 있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든, 그들은 함께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