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1150화

찬 바람이 스며드는 낡은 집,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낡은 피아노 앞에 할머니 강명자 씨가 앉아 있었다. 온기를 잃은 손가락이 상아색 건반 위를 맴돌았다. 길고 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힌 건반들은 갈라지고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젊은 날의 찬란함으로 빛나는 듯했다.

차가운 공기, 무거운 침묵

마지막 남은 가족이 집을 떠난 지 벌써 한 달.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찾아오던 손주들의 발소리마저 끊긴 집은 거대한 빈 그릇처럼 텅 비어 있었다. 거실 창밖으로는 희미한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앉은 마룻바닥을 비췄다. 그 빛 속에서 먼지 입자들이 슬프게 춤을 추고 있었다.

며칠 전, 막내아들에게서 온 전화는 할머니의 남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어머니, 아무래도 이 집은 팔아야 할 것 같아요. 더 이상은… 저희도 버티기가 힘드네요.” 매달 병원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아들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이 메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전화기를 내려놓을 뿐이었다. 이 집은, 이 낡은 피아노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마치 낡은 풍금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듯했다. 피아노 덮개를 닫아둔 채 한참을 건반만 쓰다듬었다. 나무의 결마다 새겨진 수많은 기억의 옹이들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건반 위에 스며든 시간의 향기

“엄마, 이거 언제 고쳐줄 거야?”
어릴 적, 건반 하나가 부러져 잉잉 울던 막내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할머니, 이 피아노 할아버지 젊었을 때부터 있던 거래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피아노를 올려다보던 손자의 얼굴도 어른거렸다.

수많은 아이들의 손때가 묻고, 수많은 손님들의 칭찬을 받았던 이 피아노.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피아노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남편은 서툰 솜씨로 왈츠를 연주하며 그녀에게 고백했었다.


“명자 씨, 이 곡은 내가 당신에게 바치는 마음입니다. 언젠가 이 피아노 앞에서 내가 당신의 남편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요.”

그는 어설프게 연주를 멈추고는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고백했다. 그때 피아노는 갓 들여온 새것처럼 윤이 났고, 건반 하나하나에서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심장도 그 소리처럼 격렬하게 울렸다. 그때 그가 연주했던 곡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중 한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어렵고 난해했을 그 곡을, 그녀를 위해 밤새 연습했을 그의 마음이 느껴져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고, 피아노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작은 손가락으로 쿵쾅거리며 건반을 두드렸고, 때로는 작은 장난감 칼로 건반을 긁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녀는 그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는 학교 음악회 준비를 위해 연습하는 장소가 되었고, 사춘기 시절의 고민과 방황을 위로하는 소음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퇴근 후 가끔 이 피아노에 앉아 서툰 솜씨로나마 그녀와 함께 연탄곡을 연주하곤 했다. 그의 굵고 투박한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오갈 때마다 그녀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 시간은 마치 영원할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노래

찬 공기가 다시 할머니를 현실로 데려왔다. 피아노 위의 먼지 한 겹이 그녀의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듯했다. 집이 팔리면, 이 피아노는 어떻게 될까. 고물상으로 팔려 가거나, 낯선 타인의 손에 넘어가 버릴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서 끝나는 줄 알았던 그녀의 모든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저절로 건반 위로 미끄러졌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첫 구절. 그녀의 남편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백하며 연주했던 바로 그 곡.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음색이 탁해지고 몇몇 건반은 삐걱거렸지만, 멜로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첫 음이 울리자, 이상하게도 차갑던 공기가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건반 위를 유영하는 손가락 끝에서, 과거의 목소리들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남편의 서툰 연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 자신의 젊은 날의 꿈. 피아노는 그저 낡은 나무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의 심장이었고, 가족의 영혼을 담은 거대한 기억의 창고였다.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피아노의 오래된 현들이 떨리는 소리가, 마치 지난 세월의 슬픔과 기쁨을 한데 엮어 노래하는 듯했다. 이 집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피아노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깨달았다. 이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는 멜로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 속에, 가족들의 기억 속에, 이 집의 벽 속에 영원히 울려 퍼질 것이었다.

“명자 씨, 이 곡은 내가 당신에게 바치는 마음입니다.”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할머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눈빛에는 잔잔한 빛이 돌았다. 절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가 피어났다.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는, 단순히 과거의 회한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고,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들에 대한 묵묵한 찬사였다.

그녀는 다시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삐걱거리는 피아노는 할머니의 손길에 따라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멜로디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웅장한 교향곡보다도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낡은 피아노는 지금,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집의 마지막 노래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온 한 여인의 위대한 삶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