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불어오는 바람의 징조
지우는 오래된 창가에 기대어 봄바람이 실어다 주는 향기를 들이켰다. 창밖으로는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겨우내 움츠렸던 나뭇가지들은 연둣빛 새싹을 터뜨리며 생명의 약동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우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열아홉 살, 세상의 모든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 같았던 그 해의 봄이, 그녀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 수아… 그 이름은 아직도 그녀의 심장을 저미는 고통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센 봄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었다. 휘이잉- 낮게 울리는 바람 소리는 마치 오래된 비밀을 속삭이는 듯했다. 지우는 흐릿한 눈으로 마당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수아의 작은 흔적들이 남아있을 거라 믿어지는 오래된 장독대 옆 감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수년 전부터 쌓여있던 마른 나뭇가지와 흙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가져온 작은 조각
지우는 홀린 듯 마당으로 나섰다. 싸늘한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땅을 밟으며, 그녀는 감나무 아래로 향했다. 바람은 여전히 귓가를 스치며, 마치 그녀를 이끄는 손길 같았다. 흙과 마른 풀잎에 반쯤 묻혀 있던 그것은, 작고 낡은 나무 조각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저 평범한 나뭇가지 조각 같았지만, 지우는 그것을 집어 들자마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조각에는 섬세하게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어설프지만 분명한 손길로 새겨진,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나비 문양. 그리고 그 나비의 날개 끝에는 아주 작게,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수아’.
지우의 손에서 나무 조각이 떨릴 듯 움찔거렸다. 이 조각은… 수아가 유치원 때 만들었던 나무 인형의 일부였다. 분명 낡은 상자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그녀는 서둘러 집안으로 돌아와 오래된 서랍장을 뒤졌다. 맨 아래 칸, 먼지 앉은 낡은 나무 상자 안에는 수아의 작은 그림과 빛바랜 머리핀, 그리고 함께 두었던 나무 인형이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되살아나는 과거의 그림자
지우는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가 이 인형을 꺼내 여기에 두었을까? 아니, 설마… 설마 수아가 돌아온 것일까? 불가능한 상상이라며 머리를 흔들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희망이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때, 갑자기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여기서 뭐 해? 감기 걸리겠어.”
지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동생 민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 조각을 민준에게 내밀었다. “이걸 봐, 민준아. 이걸… 이걸 수아가 만들었어. 그런데 이게 마당에서 나왔어. 인형이 없어졌어.”
민준은 나무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의 얼굴에도 당혹감과 함께 낯선 빛이 스쳤다. “누나, 이걸 대체 누가…”
“나 말고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어? 그리고 이 오래된 서랍장을 뒤질 사람이 누가 있겠어?” 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혹시 수아가 살아있는 걸까? 아니, 누군가 수아의 흔적을 들고 여기에 왔다 간 걸까?”
민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누나, 진정해. 아마 바람이 불어 어딘가에 있던 게 떨어졌을 수도 있어. 아니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아의 죽음은 그들의 가족에게 너무나도 큰 비극이었기에, 감히 ‘환상’이나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뜻밖의 방문자
그때, 낡은 대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과 지우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드리운 대문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곱게 땋아 올린 머리, 단아한 한복 차림,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지우는 저 여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스쳐 지나갔던 오래된 사진 속에서 본 듯한,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여인은 천천히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조용하고도 단호했다. 지우와 민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여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지우 씨. 민준 씨.”
그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왠지 모를 슬픔과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지우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이 여인이 바로…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여인은 손에 든 낡은 보자기를 살짝 풀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지우가 애타게 찾던 수아의 나무 인형이었다. 조각이 떨어져 나간 채, 그러나 분명한 수아의 흔적을 간직한 인형.
“이걸 찾는 것 같아서요.” 여인은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 전 그 아이의 후견인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우 씨께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봄바람이 다시 한 번 거세게 불어와 벚꽃잎을 휘몰아쳤다. 지우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수아의 인형을 든 여인의 손에서, 그녀의 운명을 뒤흔들 거대한 진실이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