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161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은은 낡은 창턱에 기대어 앉아, 검붉은 노을이 스러져가는 도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 속은 온통 복잡한 생각들로 뒤엉켜 있었다. 몇 년째 운영하던 작은 서점은 점점 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홀로 감당해야 하는 집안의 이런저런 문제들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모든 것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방 한편, 오래된 나뭇결 서랍장 위에 놓인 낡은 일기장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종이가 누렇게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 너덜거리는 그 일기장은 지은에게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숨결이자, 지혜의 샘이자, 지친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손길

지은은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겉표지를 매만지는 손길에는 그리움과 함께 한없는 존경심이 묻어났다. 생전에 할머니는 늘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아서, 매일매일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삶을 이 낡은 일기장 안에 고스란히 담아두셨다.

손끝으로 무심코 펼친 페이지는 찢어질 듯 얇고 연약했다. 희미한 묵향이 코끝을 스쳤다. 날짜는 1968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지은은 작은 글씨로 꼼꼼하게 채워진 할머니의 글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할머니의 글씨체는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단정하고 우아했다.

1968년, 가을 끝자락의 기록

“어제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진눈깨비로 변해 내린다. 텃밭의 배추들은 미처 다 거두지 못하고 하얗게 눈을 맞았다. 영감은 시름이 깊어 보였다. 한 해 농사를 지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뿐, 늘 다음 계절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인가 보다. 아이들은 연신 춥다며 불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온기 없는 방 안에서, 나는 아이들의 조그만 손을 잡아주며 부엌 아궁이의 꺼져가는 불씨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겨울과 같단다. 춥고 길게 느껴지지만, 결국은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이 오게 마련이야. 중요한 것은 그 겨울을 어떻게 견디느냐지. 불씨가 작아 보여도, 바람만 잘 막아주면 언젠가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단다.’

나는 다시 아궁이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잿더미 속에 여전히 붉은 기운을 품고 있는 작은 불씨가 보였다. 마치 포기하지 않는 우리네 삶처럼, 작지만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도 작은 불씨 하나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겨울을 견디면 분명 봄은 온다. 그리고 그 봄에는,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새싹들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움틀 것이다.”

시간을 넘어선 위로

글을 다 읽은 지은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하게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할머니의 글은 마치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1968년의 추운 겨울밤, 배추밭을 망친 걱정과 아이들의 추위를 달래던 할머니의 마음이, 2024년의 지은이 느끼는 불안감과 고통에 고스란히 겹쳐졌다. 시대는 달랐지만, 삶의 무게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불씨….” 지은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자신의 서점도, 그녀의 삶도 지금은 희미한 불씨만 남은 아궁이 같았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불씨. 하지만 할머니는 그 불씨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고, 인내하면, 언젠가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그 시절, 척박한 땅에서 가족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하고, 얼마나 많은 불씨를 지켜냈을까. 서점의 재정난, 홀로 감당해야 하는 집안일,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녀의 문제들은 할머니가 겪었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글은 그녀의 고통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힘듦을 느끼는 모든 이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지은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 속에서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작은 불씨라도 꺼뜨리지 않고 지켜내면, 분명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한 불씨가 주는 작은 온기에 의지하여, 지은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별들이 총총히 빛나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졌지만, 지은의 마음속에는 할머니의 일기장이 남긴 작은 불씨 하나가 어둠을 밝히며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추운 겨울을 견뎌낼 힘이자, 다가올 봄날에 대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