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기댄 서영의 뺨 위로 스치는 바람은, 겨우내 굳었던 대지를 깨우는 듯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애잔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오래된 한옥의 마루에 앉아,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마당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배어 있었다. 삼백예순두 번째 봄을 맞이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서영의 시간은 마치 멈춰 선 채 고요한 수면 위를 부유하는 낙엽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마당 한쪽에는 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아래로 새로 돋아난 풀잎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해마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세상을 희망의 색으로 물들였지만, 서영에게 봄은 늘 새로운 시작의 설렘보다는,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을 다시금 불러내는 계절이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봄바람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저 먼 시간의 강에서부터 떠내려온 파편들을 실어 나르는 정령 같았다. 때로는 옅은 옛 노래 가락처럼, 때로는 잃어버린 친구의 목소리처럼, 때로는 가슴 저미는 미련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오후, 서영은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고 있었다. 색이 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서영과 한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훈. 이름 석 자를 소리 없이 되뇌는 서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가, 이내 스러졌다. 그가 사라진 지 벌써 십수 년. 그 시간 동안 서영은 그를 잊으려 수없이 노력했지만, 봄만 되면 늘 이렇게 그의 잔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문득, 바람이 더욱 거세게 창문을 흔들었다. 댓돌 위 놓인 우편함 뚜껑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영은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는 오가는 편지가 거의 없는, 고요한 집이었다. 어쩌면 그저 바람이 만들어낸 작은 소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서영은 발소리를 죽여 현관으로 향했다.
우편함 안에는 얇고 흰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겉봉투에는 낯선 주소와 함께, 흐릿하지만 분명한 글씨로 ‘서영에게’라는 수신인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없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광고 우편물이 아님을 직감한 그녀는, 봉투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다시 마루로 돌아왔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도 그녀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반으로 접힌 얇은 편지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낯선 필체.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듯한 기시감. 편지의 첫 줄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서영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영 언니에게. 저 민아예요. 지훈 오빠의 여동생 민아….’
민아. 서영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오래전, 지훈과 교제할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수줍음 많던 소녀. 그녀가 왜 지금에 와서 서영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불길한 예감이 서영의 온몸을 감쌌다. 손가락 끝이 시려왔고,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편지의 내용은 짧았지만, 그 어떤 긴 이야기보다도 서영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오빠가 많이 아파요. 너무 늦게 연락드려 죄송해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언니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그 단어가 서영의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지훈이 아프다니. 그것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큼. 수십 년간 굳게 닫아두었던 서영의 마음속 빗장이 일순간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감정의 호수가 격렬한 파동으로 일렁였다.
편지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마루 위로 떨어졌다. 서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뜨거운 눈물을 터뜨렸다.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리움, 원망, 후회,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의 홍수였다. 그녀는 그동안 억눌렀던 모든 감정을 토해내듯 한참을 울었다.
그는 왜 사라졌던가. 왜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취를 감췄던가. 서영은 그가 떠난 이후, 수많은 밤을 원망과 체념 속에서 보냈다. 그의 부재가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는 흉터처럼 그녀의 삶에 깊이 새겨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닫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도 무심해지려 애썼다. 다시는 그 어떤 것도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없도록.
그러나 봄바람은 기어코 그 굳게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장 아프고도 간절한 소식을 전해왔다. 지훈이 그녀를 찾는다는 소식.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소식.
서영은 눈물을 닦아내고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워 들었다. 구겨진 종이 위로 희미하게 번진 눈물 자국. 민아가 적어놓은 병원의 주소와 연락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이내 단단한 결심을 담기 시작했다.
마지막.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서영의 모든 망설임을 압도했다. 그를 미워했고, 그리워했고, 잊으려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과거의 상처와 오해, 아픔을 넘어,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마루 밖 마당에서는 봄바람이 여전히 속삭이고 있었다. 그 바람은 서영의 뺨을 다시금 부드럽게 스쳤다. 마치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새로운 시작이 될 거라고 위로하듯이. 혹은,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라고 재촉하듯이.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서랍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아껴두었던 작은 여행 가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방 깊숙한 곳에는, 지훈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오래된 손수건이 잠들어 있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모든 이야기를 다시 깨우는 거대한 서막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서막의 다음 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