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169화

깊어가는 밤, 탐정 사무소의 낡은 나무 책상 위에는 재떨이에 쌓인 식어버린 커피잔과 잔뜩 구겨진 서류뭉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호는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의 흐릿한 도시 불빛을 응시했다. 무수한 밤들이 이렇듯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고, 그만큼 수많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그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1169번째 밤. 그 숫자는 이미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끝나지 않는 여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 은채. 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박힌 지 벌써 이십여 년. 숱한 시간이 흘러 그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였지만,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집념만은 초롱초롱한 젊은 날 그대로였다. 지호는 한숨을 내쉬며 낡은 파일철을 다시 펼쳤다. ‘은채, 이은채.’ 파일 가장 위에는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담긴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언제나 그를 맞이했다. 그 사진 속에서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현실의 그녀는 마치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았다.

최근 몇 달간, 그의 수사는 다시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지난번 발견했던 작은 실마리는 결국 또 다른 가짜 희망으로 판명되었고, 지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기나긴 터널의 끝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하는 회의감과 싸워야 했다. 그의 사무실은 낡았고, 그의 마음도 닳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의 존재 이유마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였다. 낡은 탁상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소리도 채 끝나기 전, 그의 고물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없는 번호. 늦은 밤, 이런 식의 연락은 대개 장난이거나 스팸이었다. 지호는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지호 탐정입니다.”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숨소리, 그리고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잔잔한 물소리. 지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오랜 경험상, 이런 침묵은 때때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품고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어딘가 익숙한 듯한 기시감이 지호의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지호는 몸을 곧추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제가 좀 늦게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 그 아이를 찾으시는군요.”

그 아이. 그 말에 지호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채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아이’라는 표현은 그녀를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던 사람이 쓸 법한 말이었다. 잊혀졌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그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듯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지호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펜을 꽉 쥐고 있었다.

“그 아이… 이은채. 제가 아는 은채가 맞다면, 어쩌면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요.”

‘이은채.’ 그녀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자, 지호의 심장은 쿵, 하고 크게 울렸다. 그저 막연한 추측이 아니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 드디어, 드디어 이 오랜 시간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말씀해주세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지호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동시에 깊은 갈망이 서려 있었다.

“제가… 제가 춘천에 있는 작은 공방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요. 그때 은채가… 종종 놀러 와서 저와 함께 자수를 놓곤 했죠. 특히, 그 아이는 ‘연꽃 나비’ 문양을 좋아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잘 하지 않는 복잡한 문양이었는데, 은채는 그걸 참 좋아하고 잘 따라 그렸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손재주가 너무나 특별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꽃 나비’ 문양. 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 잊고 있던, 아니,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특별한 단서로 인식하지 못했던 기억의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

뜨거운 여름날, 춘천의 작은 호숫가에서 지호와 은채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은채가 보여주는 스케치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케치북 안에는 수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연꽃과 그 위를 나는 나비의 모습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때? 예쁘지? 나 이거 자수로 놓을 거야. 엄마가 얼마 전에 사준 자수 세트로.” 은채는 반짝이는 눈으로 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런 섬세한 문양이 좋더라. 복잡한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연꽃은 고귀함을, 나비는 자유를 상징한대.”

그 어린 시절, 지호에게는 그저 예쁜 그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은채는 달랐다. 그녀는 그 문양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지호는 그저 미소 지으며 은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예뻐. 은채랑 꼭 닮았네.”

“뭐야, 내 얼굴이 연꽃 나비 같다는 거야?” 은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지호의 팔을 툭 쳤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맑은 호숫가에 울려 퍼졌다.

***

수화기 너머의 여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자기가 만든 작은 자수 손수건을 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어요. 연꽃 나비 문양이 수놓아진… 아직도 가지고 있을 텐데.”

지호는 펜으로 ‘춘천, 공방, 자수, 연꽃 나비 문양, 손수건’ 등의 단어를 빠르게 받아 적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단서는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채의 예술적 감각, 그녀의 특별한 손재주, 그리고 그들 사이의 오랜 추억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무도 몰랐을, 오직 은채와 그, 그리고 어쩌면 그 공방의 여인만이 알 법한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였다.

“그 손수건, 혹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공방 위치나… 그곳의 이름이라도요.” 지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요. 제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 하지만, 퇴원하면 제가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손수건도 찾아보구요. 공방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주변엔 아직 몇몇 오래된 상점들이 남아있을 거예요. 은채가 종종 그곳에서 실이나 천을 사가곤 했죠.”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이내 작별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지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마지막 희망이, 드디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는 즉시 컴퓨터를 켜고 춘천의 오래된 공방들과 수예점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연꽃 나비’ 문양. 그것이 과연 그의 은채를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은채는 과연 그 섬세한 손재주를 계속 이어갔을까? 그녀의 삶 속에 여전히 그 문양이 존재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호는 어느 때보다도 분명한 목표 의식을 느꼈다. 이 밤은 더 이상 길고 지루한 절망의 밤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가슴 벅찬 새벽의 전조였다. 그의 손은 지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춘천. 그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향한 그의 탐정 인생, 그 1169번째 장이, 마침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