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168화

오래된 흙의 미소

가을비가 잦아들 무렵, 서울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낡은 골목길은 더욱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강우진은 잿빛 코트 깃을 올리고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수없이 많은 밤을 헤매고, 수없이 많은 실망을 견뎌낸 사람의 그것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의 삶은 윤서연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미로 그 자체였다.

최근 그가 얻은 단서는 극히 미미했다. 한 공예 잡지의 작은 칼럼에 실린 도예 공방의 사진. 그곳에서 스쳐 지나듯 찍힌, 옅은 색감의 도자기 잔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연이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다던, 아주 특별한 형태의 잔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파 속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본 것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오랜 수소문 끝에 찾아낸 공방은 좁은 골목 안쪽에 숨어 있었다. ‘푸른 흙’이라는 간판이 낡았지만 정갈했다. 유리문 너머로 흙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1167번의 헛된 발걸음, 1167번의 무너지는 희망. 이번에도 그럴까. 그러나 그의 발은 이미 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흙 공방에서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조용히 울렸다. 공방 안은 겉보기와는 달리 넓고 따뜻했다. 한쪽 벽에는 완성된 도자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물레가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굽고 있는 도자기들 때문인지,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어서 오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레 앞에 앉아 작업 중이던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눈빛은 맑고 인자해 보였다. 그녀의 손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우아했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우진은 가능한 한 목소리를 낮췄다.

“네, 편하게 보세요. 특별히 찾는 것이 있으신가요?” 여인은 미소 지으며 다시 물레에 집중했다.

우진은 공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작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편에 진열된 작은 도자기 잔에 멈췄다. 잡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잔이었다. 옅은 회색빛에 매끄러운 곡선, 그리고 손잡이 부분에 새겨진 섬세한 나뭇가지 문양. 서연이 꿈꾸던 ‘시간을 담는 잔’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 잔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흙의 질감, 은은한 온기. 마치 서연의 손길이 닿았던 것만 같았다. 십여 년 전,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스케치북에 이런 모양의 잔을 그리며 해맑게 웃던 서연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진아, 이 잔은 말이야, 마시는 사람의 마음까지 평화롭게 해주는 잔이 될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 잔… 정말 아름답네요.” 우진은 겨우 말을 이었다.

여인이 물레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 잔이요. 예전 제자 한 명이 디자인한 건데… 아주 특별한 아이였죠.”

우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제자요? 혹시… 어떤 분이셨나요?”

잊혀진 이름, 새겨진 흔적

“음…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벌써 몇 년 전 일이라서. 워낙 짧게 있다 갔거든요. 하지만 그 아이의 감각만큼은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가르쳤던 수많은 제자 중에 가장 흙의 마음을 잘 아는 아이였죠. 특히 저 잔은, 그 아이가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어찌나 혼신의 힘을 다하던지… 밤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우진은 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서연일까? 정말 서연일까? 그녀의 이름은 윤서연.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이름이 이 공방에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분은… 혹시 눈매가 아름답고, 밝게 웃는 분이셨나요? 그리고… 조금 마른 체형에….” 우진은 애써 침착하게 그녀의 특징을 묘사했다.

“어머, 꼭 아시는 분처럼 말씀하시네요.”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글쎄요, 얼굴은 희미한데… 성격은 참 밝았어요. 언제나 꿈을 꾸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공방을 떠났는지….”

“떠났다고요? 어디로요?”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인은 살짝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만 했어요. 제가 혹시 그 아이의 흔적을 찾으시는 분인가요?”

우진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네, 아주 오래된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도예를 정말 사랑했거든요. 혹시… 그분의 연락처나 다른 기록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을까요?”

“흐음… 제자들 정보를 따로 보관하지는 않는데….”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작업실 한구석에 졸업 작품을 만들며 남겨둔 스케치북이 몇 권 있을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자기 것 다 가져갔는데, 그 아이는 급하게 가느라 못 가져갔다고 했던 것 같아요. 혹시 그 안에 단서라도 있을까… 잠시만요.”

여인은 물레 옆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헤치며 안쪽 작업실로 들어갔다. 우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서연의 스케치북이라니. 만약 그게 서연의 것이라면, 십 년 넘게 찾아 헤매던 그녀의 흔적이 바로 여기에, 그의 손이 닿을 곳에 있다는 말 아닌가.

몇 분 후, 여인은 낡고 먼지 쌓인 스케치북 세 권을 들고 나왔다. “여기 있네요. 흙먼지가 좀 많지만, 그림은 선명할 겁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첫 번째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안에는 다채로운 형태의 도자기 디자인과 함께, 낯익은 필체로 쓰인 작은 메모들이 가득했다.

‘흙의 숨결을 느끼는 법’
‘어머니께 드릴 찻잔 디자인’

그리고 페이지 한 구석에는 작은 그림과 함께 낯익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오늘도 강우진 바보 같은 웃음에 힘이 난다. 😊’

그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그의 이름, 그의 이름을 서연이 적어놓은 것이었다. 이 스케치북은 틀림없이 서연의 것이었다.

여인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찾으시는 분이 맞는 것 같네요.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니.”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십여 년의 시간이, 그 모든 그리움과 아픔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그는 스케치북을 품에 꼭 안았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매던 탐정의 긴 여정 속에서, 비로소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가장 선명한 증거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혹시… 이 스케치북 안에… 다른 연락처나… 아주 작은 단서라도….” 우진은 흐느끼듯 물었다.

여인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겨보세요. 어떤 흔적은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가 있을 거예요. 공방을 떠나면서, 제게 건네려다 결국 놓아두고 간….”

우진은 다시 스케치북을 펼쳤다. 마지막 장, 다른 스케치들과는 달리 얇은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작은 메모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제게 꿈만 같았어요. 이제 저는… 새로운 시작을 찾아 떠납니다. 잊지 못할 이 모든 기억을 안고, 저는 작은 섬으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제가 찾던 진정한 흙의 마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덧붙여… 제가 만약 우연히 아주 먼 훗날, 제 흔적을 쫓는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이 말을 전해주세요. ‘그때의 나를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나를 찾아달라고.’’

작은 섬. 새로운 시작. 새로운 나.

우진은 메모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서연의 글씨, 그리고 그녀가 남긴 희미한 지시. 탐정 강우진의 다음 목적지는, 이제 미지의 ‘작은 섬’이었다. 그의 가슴은 아픔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