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병원 복도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만큼이나 이 지우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는 숱한 밤을 지새우며 익숙해졌지만, 그 익숙함이 불안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창밖으로는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희미한 병원 조명 아래에서도 그 눈송이들은 고유의 빛을 잃지 않고 춤추듯 내려앉았다. 그때와 똑같은 눈이었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시리고, 냉정한 눈이었다.
수현의 병실 문이 닫히고 의사의 깊은 한숨이 이어졌을 때, 지우는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의사의 목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희미했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지우의 머릿속을 맴돌다 이내 형태를 잃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지우는 손에 든 작은 눈꽃 모양의 은색 펜던트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이 펜던트는 그녀에게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바래지 않는,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마치 흑백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열 살의 지우, 열두 살의 서준,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늘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던 여덟 살의 수현.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세상은 온통 흰 눈처럼 순수했다. 수현의 병세가 잠시 호전되었던 어느 겨울날, 세 사람은 병원 뒤편의 작은 정원에 몰래 숨어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눈꽃이 피어나는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언니, 오빠. 나 눈사람 만들고 싶어. 커다란 눈사람.”
수현의 작은 목소리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몸이 약해 뛰어놀 수 없었던 수현은 늘 창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수현의 작고 가는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수현아, 걱정 마. 언젠가 오빠랑 언니가 꼭 너랑 같이 커다란 눈사람 만들게 해줄게.”
서준의 말에 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응, 언니가 꼭… 꼭 너 지켜줄게.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
그때, 서준이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은색 펜던트를 수현의 목에 걸어주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눈꽃 모양이었다. “이건 약속의 증표야. 눈꽃이 다시 내릴 때마다 이 약속을 기억하는 거야. 우리는 항상 널 지켜줄 거야.”
수현은 가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도 눈부셨다. 그날 세 사람은 차가운 눈밭 위에 손을 포개고 굳은 약속을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를 지키고, 수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순수한 눈꽃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의 무게
현재로 돌아온 지우는 펜던트를 더욱 세게 쥐었다. 그 약속은 그녀의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해왔다. 수현을 위해 지우는 악착같이 공부했고, 악착같이 일했다. 수현을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노력이 부질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의사의 말은 곧, 수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잔인한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지우 씨, 저희는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의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새로운 임상 시험 단계에 있는 치료법인데… 성공률이 매우 낮고, 부작용 또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환자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지우의 가슴속에서 희미한 희망이 아득한 빛처럼 깜빡였다. 성공률이 낮고 부작용이 크다고 해도,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수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수현의 희미한 미소와,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의 약속이었다.
“선생님, 그 치료법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지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심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맹렬한 의지가 번뜩였다. 의사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이것은…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충분히 상의해 보셔야 합니다.”
바로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는 고개를 돌렸다. 한 서준이었다. 그의 코트 위에는 이미 하얀 눈꽃들이 작은 보석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지우의 눈을 정확히 응시했다. 걱정, 위로, 그리고 이해가 담긴 눈빛이었다. 마치 지우의 마음속 불안과 결심을 모두 읽고 있는 듯했다.
서준은 지우의 곁으로 다가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은 지우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주는 듯했다. 지우는 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과, 함께 짊어진 약속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선생님, 지우의 결정에 동의합니다.” 서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지우의 손에 쥐여 있던 눈꽃 펜던트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린, 똑같은 모양의 펜던트를 살짝 만졌다. “저희는 수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의사는 두 사람의 굳건한 눈빛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희망을 넘어선,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약속의 힘이었다.
수현이 입원한 병실 창밖으로, 하얀 눈발은 여전히 쉴 새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그렇게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지우는 서준의 온기 어린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약속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꼭 수현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 수 있기를… 간절한 소망이 지우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