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짙은 안개 속을 뚫고 도착한 강원도 정선의 한 시골 마을은 여전히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이어졌던 바비큐 파티의 잔재들이 마당 한켠에 어지럽게 남아있었지만, 그조차 평화롭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의 기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침을 깨우기 시작했다.
“아빠, 내 양말 어디 갔어요! 어제 저녁에 널어놓은 건데!”
열여덟 살 딸 혜진이가 이불을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그 소리에 아빠가 ‘으음…’ 하며 잠결에 뒤척였다. 거실에서는 열두 살 아들 준우가 벌써부터 텔레비전을 켜고 애니메이션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요란한 효과음이 아침의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준우야! 아침부터 소리 크게 틀지 마!”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딸그락’ 하고 냄비 뚜껑이 놓이는 소리, ‘쏴아’ 하고 물이 끓는 소리가 합쳐지며, 고요했던 시골집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가족 여행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목적지는 ‘어둠의 전당’이라는 별명을 가진 석회암 동굴이었다. 아빠는 어제부터 신이 나서 동굴 안내 팸플릿을 수도 없이 읽어댔다.
“여기가 말이야, 종유석이랑 석순이 어마어마하게 멋있대! 특히 ‘지하 궁전’이라는 곳은 높이가 30미터에 달해서…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대!”
아빠는 마치 자신이 동굴을 발견한 탐험가라도 되는 양,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혜진이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들어가면 다 똑같은 돌덩어리일 텐데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혜진아! 그래도 아빠가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엄마가 혜진이를 나무랐지만, 혜진이는 이미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준우는 아빠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웠다.
“와, 진짜요? 그럼 혹시 거기 괴물도 살아요?”
“괴물은 무슨 괴물이야. 그냥 돌덩이 천국이지.” 혜진이가 다시 훼방을 놓자, 준우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채비를 마친 가족은 동굴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와닿았다. 웅장하게 펼쳐진 동굴 입구는 마치 거대한 괴물의 입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였다.
혜진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 왠지 으스스해. 이런 데 왜 오는 건지 몰라.”
“야, 혜진아, 이왕 온 거 재미있게 즐겨야지!” 아빠는 어느새 손전등을 꺼내 들고 이마에 헤드랜턴까지 착용하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우는 이미 앞서가는 다른 관광객들 틈에 끼어들어가면서 ‘와, 엄청나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엄마는 짐 가방을 꼼꼼히 확인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물병, 비상약, 그리고 초콜릿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동굴 속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희미한 발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종유석과 석순을 비추며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아빠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을 찍었고, 준우는 신기한 듯 손전등으로 구석구석을 비춰댔다. 혜진이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따금씩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무심한 듯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 아주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닌 듯했다.
안내원의 설명을 따라 깊숙이 들어갈수록 길은 점점 좁아지고 어두워졌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는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특히 이 구간은 ‘비밀의 통로’라고 불리는데,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팔라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안내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우가 ‘와, 비밀의 통로래!’ 하고 흥분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준우야! 뛰지 마!” 엄마의 목소리가 뒤따랐지만, 이미 준우는 좁은 통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철제 난간을 잡고 몸을 숙여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간도 있었고,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질 것 같은 젖은 바위들도 즐비했다.
“흐읍… 흐읍…”
어둠 속에서 준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준우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으아앙! 아파! 아빠!”
가족 모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빠가 손전등을 비추며 황급히 달려갔다. 좁은 통로 구석에 준우가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울고 있었다. 작은 무릎에 흙이 묻어 있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준우야! 괜찮아? 어디 다쳤어?”
엄마가 허둥지둥 준우에게 다가가 앉으며 무릎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준우는 어둠 속에서 넘어졌다는 공포감과 함께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흑… 너무… 너무 어두워… 아빠… 무서워…”
준우의 울음소리가 좁은 동굴 벽을 타고 퍼져나갔다. 아빠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괜히 아까 ‘괴물은 무슨 괴물이야’ 하고 무시했던 혜진이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빠는 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되뇌었지만, 그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둠, 그리고 빛
그때였다. 혜진이가 툴툴거리며 걸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준우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켰다. 휴대폰의 밝은 빛이 준우가 넘어진 바닥을 환하게 비췄다.
“별것도 아니구만, 뭘 그렇게 울어. 바보같이.”
혜진이의 말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손전등 빛은 준우에게, 그리고 가족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위안이 되었다.
“자, 이거 잡아. 얼른 일어나.”
혜진이는 투박하게 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우는 울먹이며 그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혜진이는 준우의 작은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평소에는 ‘징그러워!’라며 손도 잡으려 하지 않던 누나였다. 준우는 혜진이의 따뜻한 손을 잡자마자 울음이 뚝 그쳤다.
엄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싸우고, 서로를 놀리고, 멀리 떨어져 앉기 바빴던 남매가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 엄마의 눈가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괜찮아, 준우야. 누나가 손 잡아줄게. 그리고 엄마 아빠도 옆에 있잖아.”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렸다. 아빠는 혜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혜진이는 피식 웃으며 ‘뭐야, 아빠’ 하고 싫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우는 혜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었고, 혜진이는 휴대폰 손전등으로 앞길을 비춰주었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불빛은 마치 작은 등대처럼 길을 안내했다.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앞서가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족 모두의 보폭을 맞춰 나갔다. 비록 발걸음은 더 느려졌지만,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온기는 훨씬 더 깊어졌다.
드디어 좁고 어두운 ‘비밀의 통로’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지하 궁전’은 아빠의 호들갑대로 정말이지 장엄했다. 거대한 석순과 종유석들이 신비로운 빛을 받으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가족들은 풍경보다는 서로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준우는 여전히 혜진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고, 혜진이는 그런 준우를 말없이 챙겼다. 아빠는 뿌듯한 얼굴로 엄마와 혜진이, 준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까의 당황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든든한 가장의 미소가 채우고 있었다.
다시, 세상 밖으로
동굴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동굴 안의 서늘함과는 확연히 다른,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공기였다. 가족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준우는 금세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다시 활발해져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와, 햇빛이다! 아빠, 저기 아이스크림 팔아요!”
혜진이는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빠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준우 힘들었으니까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혜진이도 뭐 먹을래?”
“됐어.” 혜진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준우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해맑게 웃자, 그녀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엄마는 따스한 햇살 아래 선 가족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시끌벅적함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깊어진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가족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던 경험이, 오히려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환하게 비춰준 빛이 된 셈이었다. 동굴 밖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가족들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또 어떤 소란과 어떤 감동으로 채워질까. 가족들은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서로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가족 여행은 그렇게, 또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