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첫눈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눈송이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부서지는 모습은, 이진우의 심장 속을 맴도는 수많은 파편들과 닮아 있었다. 서재의 묵직한 공기 속에서 그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유리창에 기댔다. 1177화.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이 어디쯤일지, 그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오늘 밤 그의 손끝에서 결정될 하나의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예감만이 차가운 공기처럼 그의 폐부를 찔렀다.
탁자 위에는 ‘하늘그룹’ 이사회 최종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태양 그룹과의 합병 건. 명목상으로는 두 거대 기업의 상생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었으나, 이진우는 그 가면 아래 감춰진 김민준의 검은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합병이 성사되는 순간, 태양 그룹은 ‘별무리 마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손에 넣게 될 터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리고 한서연과 함께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작은 마을을.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서연이었다. 망설임 끝에 화면을 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단 있었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우야, 보고 있어? 마을에 첫눈이 온대. 아이들이 난리가 났어.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이 풍경, 잊지 않았지?”
서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후벼 팠다. 잊지 않았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의 약속은 그의 삶을 묶는 족쇄이자, 동시에 유일한 이정표였다.
창밖을 다시 응시했다.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한 과거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
그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다. 겨울 햇살이 눈 결정에 반사되어 오색찬란하게 부서지던 날. 어린 이진우와 한서연은 눈사람을 만들다가 차가운 손을 호호 불며 작은 오두막으로 뛰어들었다.
“서연아, 손 시려워?”
“응, 진우 너는? 빨리 불 쬐자.”
아궁이의 불꽃은 언제나 따뜻했고, 할머니의 미소는 늘 인자했다. 하지만 그날 할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개발’이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사라진다’는 섬뜩한 말이 아이들의 귀에 스며들었다.
별무리 마을이 사라진다고? 할머니의 잔주름 가득한 손이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어린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제야 서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는 듯했다.
“서연아, 우리 약속하자.”
“무슨 약속?”
진우는 작고 시린 서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아궁이 불빛이 두 아이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다.
“이 마을, 이 풍경, 할머니랑 우리 모두, 절대로 사라지지 않게 지켜주자. 어른이 되면 힘이 생기면 우리가 꼭 지켜줄 거야.”
서연의 눈동자에 별빛이 총총 박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마을,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하게 우리가 꼭 지켜주자. 영원히!”
두 아이는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 비장하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창밖에서는 겨울 눈꽃이 흩날리며 그들의 순수한 맹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약속은 너무나 순수했고, 너무나 거대했으며, 너무나 이루기 어려웠다.
***
“이진우 대표님. 투표 시간입니다.”
비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현실로 돌아온 이진우는 눈을 감았다. 김민준의 냉철한 눈빛, 태양 그룹의 막대한 자본력, 그리고 그 앞에 초라하게 스러져가는 별무리 마을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합병에 찬성하면 하늘그룹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그는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의 어린 시절, 서연과의 약속, 그리고 별무리 마을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영원히!’ 서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회장은 차가운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김민준의 조롱기 섞인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사회 의장은 그의 결정을 재촉했다.
“이진우 대표님, 최종 결정은?”
진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도시 위로 하얀 눈꽃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약속했던 그 순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저는…”
그의 목소리가 이사회장에 울려 퍼졌다. 단호했지만, 동시에 깊은 고뇌가 서린 목소리였다.
“태양 그룹과의 합병에 반대합니다.”
이사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김민준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다른 이사들의 표정은 경악과 혼란으로 물들었다. 이진우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의 결정은 하늘그룹에 막대한 타격을 줄 것이고, 그의 입지는 뿌리째 흔들릴 터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묘하게 평화로웠다.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첫걸음. 어쩌면 그는 이 한 번의 선택을 위해 지난 모든 세월을 버텨왔는지도 몰랐다.
“이사회 의장님, 그리고 이사님들. 저는 이 합병이 단순히 경제적인 손익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훼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선은 김민준을 향했다.
“별무리 마을은 단순한 개발지가 아닙니다. 그곳은 누군가의 삶이고, 누군가의 기억이며, 누군가의 약속입니다. 저는 그 약속을 버릴 수 없습니다.”
김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진우! 미쳤군! 개인적인 감정으로 회사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셈인가!”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제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된 첫발을 내딛는 겁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쏟아져 내렸다. 하얗고 깨끗한 눈송이들이 어둠을 덮으며, 오래된 약속의 무게를 감싸 안는 듯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리라. 이진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그 모든 세월을 넘어, 마침내 오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오래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눈사람 옆에 활짝 웃는 어린 서연과 자신의 모습. 사진 속 그들의 미소는 오늘 내리는 눈꽃처럼 순수하고 빛났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