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1180화

바람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산자락을 휘감아 돌던 매서운 겨울바람은 지영의 얇은 코트 깃을 파고들어 온몸을 떨게 했다. 늦은 오후, 희뿌연 하늘 아래 산모퉁이 작은 길을 따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은 힘없이 바닥을 끌었다. 어깨 위에는 낡은 가죽 가방이 무겁게 얹혀 있었고, 그 안에는 한 달 치의 삶을 겨우 지탱할 몇 점의 그림 도구와 스케치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하면서도 낯선 온기가 느껴지는 건물 앞에 다다랐다. 문 위에는 작은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 지영은 이곳에 처음 와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이 빵집의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마음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이 기적처럼 위로를 얻는다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전설 같은 이야기. 하지만 지영은 그런 이야기에 더 이상 기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으려 망설이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이 겨울 저녁, 어디든 잠시 몸을 녹일 곳이 필요했다. 짤랑- 문을 열자, 따뜻한 종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동시에 밀려드는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 갓 구운 빵의 향기는 차가웠던 지영의 코끝을 간질이며, 잊고 있던 배고픔을 일깨웠다.

빵집 안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들이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고, 나무로 된 진열대 위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빵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몇몇 손님들이 작은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와 빵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는 소박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지영은 그들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들처럼 웃을 수 있을까, 다시?

카운터 뒤에는 흰 제빵사 모자를 쓴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눈빛은 깊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김명인 명장이었다. 지영은 아무 말 없이 진열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빵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웠지만,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어떤 것도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날이 많이 춥죠?” 명장님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지영의 귓가에 닿았다. “어떤 빵을 찾으시는지요?”

지영은 고개를 들었다. 명장님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냥… 아무거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스스로도 겨우 들릴 정도였다.

명장님은 말없이 지영을 응시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진열대 한쪽 구석에 놓인, 소박해 보이는 작은 호밀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빵은 오늘 아침에 직접 밭에서 따온 보리로 만들었어요. 맛은 투박하지만, 속은 가장 따뜻하답니다.”

명장님은 빵과 함께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지영은 주머니 속 지갑을 꺼내려 했지만, 명장님은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제가 대접하고 싶네요. 저기 창가 자리, 햇볕이 제일 잘 드는 곳으로 가 앉으세요. 해가 지기 전, 마지막 온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빵과 차를 받아 들고 창가 자리로 향했다. 명장님의 말대로, 작은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노을빛이 희미하게 남아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면서도 쫀득한 식감.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보리 향.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한 위로가 느껴졌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자락에 걸린 해가 마지막 붉은 빛을 토해내며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빵집 벽에 걸린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흑백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김명인 명장님과 밝게 웃고 있는 한 여인이 함께 빵을 만들고 있었다. 여인의 눈빛은 명장님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명장님의 부인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 여인의 손에는 빵 반죽이 묻어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지영은 자신도 한때 저런 미소를 지었음을 기억했다.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 위에 물감을 짜내고 붓으로 세상을 표현할 때의 희열.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그녀의 손끝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붓을 쥐는 것조차 고통스러웠고, 머릿속의 이미지는 더 이상 손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희망은 사그라들고,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문득, 옆 테이블에서 할머니 한 분이 지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그 빵 맛있죠? 우리 명장님이 만드신 빵은 그냥 빵이 아니야. 마음을 담은 빵이지.” 이 할머니는 이 빵집의 단골 중의 단골, 이 동네에서 ‘이 할머니’라고 불리는 분이었다.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분이었다.

지영은 굳어 있던 입술을 겨우 열었다. “네… 따뜻하네요.”

“따뜻해야지. 이 겨울에, 이 빵 하나라도 따뜻해야지. 사람 마음도 그렇지 뭐.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은 마음도, 따뜻한 빵 한 조각에 스르르 녹아내리는 법이란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따뜻한 차 잔을 어루만졌다. “나는 말이야, 가끔 그림 그리는 아가씨를 보면 돌아가신 우리 손녀딸 생각이 나. 손녀딸도 그렇게 재주가 좋았는데… 꿈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먼저 갔어.”

할머니의 이야기에 지영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과의 공명. 할머니는 지영의 눈물을 본 듯했지만, 모른 척 자신의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봄은 다시 오는 법이란다. 우리 명장님 빵처럼, 겉은 투박해도 속은 따뜻하게 채워놓아야 해. 그래야 봄을 맞을 준비를 하지.”

할머니의 말은 깊은 우물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지영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시 빵 조각을 뜯어 먹었다. 보리의 고소함, 씹을수록 느껴지는 은은한 단맛. 이 빵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장님의 정성, 할머니의 위로,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의 조각이었다. 손끝에 묻은 빵 부스러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붓 대신 빵 반죽을 만졌던 사진 속 여인의 손처럼, 어쩌면 그녀의 손도 다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그러나 선명한 불꽃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빵은 절반쯤 남아 있었다. 남은 조각을 종이봉투에 넣어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다시 카운터로 가서 명장님 앞에 섰다. “고맙습니다, 명장님. 그리고… 할머니.”

명장님은 지영의 눈빛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알아챈 듯,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음에 올 땐, 그림 도구를 가져와서 저기 창밖 풍경을 그려보는 건 어때요? 봄이 오면, 저 산모퉁이에 예쁜 꽃들이 피어날 겁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속에는 더 이상 냉기만 흐르지 않았다. 희미하게나마, 잃었던 색깔의 조각들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둠이 완전히 깔렸지만,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이제는 왠지 모르게 상쾌하게 느껴졌다. 지영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손끝에는 아직 빵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서 받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