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낡은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먼지 입자들을 깨워 공기 중에 흩뿌렸다.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현우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폐쇄된 지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느 외딴 연구소의 서고였다. 이지원, 그의 잃어버린 첫사랑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관련되었다는 비밀 프로젝트의 흔적을 좇아 그는 여기까지 왔다.
1188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수많은 단서들이 실낱처럼 이어졌고, 그 실은 때로는 희망의 빛을, 때로는 깊은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순간에도 현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오직 하나의 염원, 지원을 찾겠다는 맹세뿐이었다.
“지원아…”
낮게 읊조린 이름이 텅 빈 공간에 울렸다 사라졌다. 현우의 손전등이 어둠 속을 헤치며 겹겹이 쌓인 서류와 고서들을 비췄다. 교수 최의 마지막 연구실. 지원이 그를 도왔던 마지막 장소. 그녀가 남긴 흔적이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서가 사이를 끈질기게 훑었다. 먼지에 덮인 표지들을 지나, 손때 묻은 모서리들을 확인하며, 혹시나 지원의 손길이 닿았던 책이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걸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쪽 벽면에 고정되었다. 다른 서가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질감의 나무 패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직감이 현우의 심장을 격렬하게 울렸다. 그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패널을 두드렸다. 둔탁한 속 빈 소리. 예상대로였다.
패널을 밀어내자, 안쪽에서 낡은 금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서류 보관용이 아닌, 꽤 견고하게 만들어진 금고였다. 번호 자물쇠.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그는 이미 교수 최의 일기장과 연구 노트를 통해 금고 번호를 유추하고 있었다. 지원의 생일,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난 날짜, 그리고 교수 최의 마지막 연구 코드. 몇 번의 시도 끝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금고 문이 열리자, 내부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안에는 예상했던 두꺼운 연구 보고서나 기밀 문서 대신, 작은 나무 상자와 함께 얇은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빛바랜 머리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지원이 가장 아끼던, 직접 만들어서 현우에게 보여주었던 꽃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머리핀을 쓸었다.
“지원아… 네가 이걸 여기에…”
그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오랜 세월 끝에 만난 그녀의 작은 흔적은, 어떤 거대한 단서보다도 강렬한 감정의 파고를 일으켰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옆에 놓인 편지 봉투로 향했다. 봉투에는 아무런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낡은 종이의 질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현우는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한 장의 찢어진 사진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사진은 절반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찢어낸 듯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교수 최와, 그 옆에 서 있는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지원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쪽지. 단 세 줄의 짧은 메시지였다.
그들은 모른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 북쪽의 별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진실이 잠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살아있다. 윤 교수를 찾아라.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들은 모른다.’ 이것은 지원이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이유, 어쩌면 그녀를 쫓는 거대한 세력에 대한 경고일지도 몰랐다. ‘북쪽의 별이 떨어지는 그곳.’ 지명인지, 암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중요한 단서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는 아직 살아있다.’ 이 ‘그’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사라졌다고 알려진 인물? 아니면 지원을 위협하는 새로운 존재?
가장 중요한 것은 ‘윤 교수를 찾아라’는 지시였다. 현우는 예전에 교수 최의 조수로 일했던 윤 교수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교수 최의 연구가 중단된 직후 갑자기 잠적했었다. 어쩌면 그는 지원의 행방과 관련된 핵심 정보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
현우는 머리핀과 쪽지, 그리고 반쪽짜리 사진을 조심스럽게 금고에서 꺼냈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윤 교수를 향해야 했다. 그리고 ‘북쪽의 별이 떨어지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1188화. 이 긴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거대한 미궁의 시작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일어섰다. 지원이 남긴 희미한 불꽃이 그의 심장 속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이 모든 실마리가 마침내 그를 지원에게 데려다줄 것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