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얇은 스웨터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에도 지은은 난간에 기댄 채 옥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별들을 삼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끈질기게 빛을 뿌리는 작은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들린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언제나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밤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는 당신의 밤을 지켜주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입니다. DJ 은하입니다.”
따뜻하면서도 살짝 허스키한 은하 DJ의 목소리는 지은의 외로운 밤에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사 온 지 한 달, 낯선 도시의 밤은 유독 길고 쓸쓸했다. 낮에는 새로 시작한 일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밤이 되면 텅 빈 마음에 오래된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곤 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 중 가장 짙은 것은 언제나 수현의 것이었다.
은하 DJ는 첫 곡으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의 곡을 소개했다. “오늘 밤, 문득 잊고 지냈던 누군가가 떠오른다는 사연이 많이 도착했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엔,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은 별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별자리
수현.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초등학교 때 옆집으로 이사 온 수현은 지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진정한 친구’였다. 함께 숙제를 하고, 좁은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밤늦도록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들. 지은의 가장 소중한 기억 속에는 언제나 수현이 함께였다.
“지은아, 우리 나중에 어른 되면 꼭 같이 카페 차리자! 나는 커피 만들고 너는 예쁜 그림 그리고!” 수현의 반짝이던 눈빛이 떠올랐다.
“좋아! 우리 카페 이름은… ‘별똥별’ 어때? 밤하늘에 소원 빌면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 카페에서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야!” 지은은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었다.
그 약속은 오래도록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미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길이 조금씩 달라졌고, 사소한 오해가 커다란 벽이 되었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그날 밤의 대화가 지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현의 날카로운 말들, 그리고 그에 지지 않으려 내뱉었던 지은의 차가운 대꾸들. ‘너는 항상 그래!’ ‘너야말로 변했어!’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상처 주는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연락이 끊겼고, 잃어버린 별자리처럼 서로의 궤도를 벗어나 버렸다.
지은은 한숨을 쉬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오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벽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먼저 손을 내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수현의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수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만난다고 한들, 그때의 우리가 다시 될 수 있을까?
익숙한 위로의 목소리
라디오에서는 사연 하나가 흘러나왔다. “DJ님, 저는 오래된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5년이 넘었습니다. 그 친구와 다시 만나고 싶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용기가 나지 않아요. 혹시 그 친구도 저를 그리워할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늦은 걸까요?”
마치 지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그녀는 라디오에 더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5년이라는 시간, 짧지 않은 시간이죠.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유효기간이 없다고 생각해요.” 은하 DJ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쩌면 그 친구분도 같은 밤하늘을 보며 당신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용기란 건, 거창한 행동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작은 메시지 한 통, 무심한 듯 건네는 안부 인사 한마디에서 시작될 수 있는 거죠.”
이어 DJ는 오래된 팝송을 틀어주었다. 가사는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밝은 별을 따라가라’고 속삭였다. 지은은 밤하늘의 별들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문득 ‘별똥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수현과 함께 꿈꾸던 카페 이름. 그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소원이자 희망이었다.
지은은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자, 텅 빈 연락처 목록이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 수현의 번호는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린 터였다. 아니,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래된 백업 파일을 뒤져보았다. 몇 년 전의 옛날 휴대폰 백업 파일, 사진첩, 그리고 메신저 대화 기록들… 그 속에서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수현 ♡’
낡은 백업 파일 속, 마지막으로 저장된 수현의 전화번호. 그 번호는 마치 박물관의 유물처럼 먼지 쌓인 데이터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저장된 번호를 누를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새로운 새벽을 향한 발걸음
“별밤 가족 여러분, 오늘 밤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외로워도, 우리 머리 위엔 늘 별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그 별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용히 비춰주고 있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은 별 같은 사람에게, 오늘 밤 용기 있는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저는 DJ 은하, 내일 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DJ의 마지막 멘트가 지은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 용기.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작은 메시지 한 통.
지은은 조심스럽게 수현의 번호를 복사해서 새 메시지 창에 붙여넣었다. 톡톡거리는 키패드 위에서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잘 지내?’ 너무 뻔한가? ‘오랜만이야’ 너무 어색한가?
결국, 지은은 짧고 단순한 한마디를 보냈다.
[수현아, 잘 지내? – 지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짓눌러왔던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답장이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번호가 바뀌었을지도, 아니면 수현이 지은과의 연락을 원치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지은은 오랜 망설임을 끝내고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라디오는 꺼졌지만, 옥상 위 밤하늘은 여전히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지은은 차가운 난간을 잡고 서서, 멀리 보이는 불빛들을 응시했다. 밤은 깊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희미한 별빛 같은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별들 중 어딘가에서 수현도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잃어버렸던 별자리가, 언젠가 다시 만나 빛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지은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새벽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옥상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