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낡은 일기장을 펼친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을 넘어 할머니의 방 안으로 길게 드리워져 먼지 앉은 공기 속을 유영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품은 일기장은, 오래된 한지의 아득한 냄새와 함께 지혜의 손끝에 묵직하게 놓여 있었다. 지난 수년간 이 일기장을 읽으며 할머니 순임의 젊은 날과 마주해왔지만, 오늘만큼은 글자 하나하나가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가장 최근에 발견한 페이지, 아니, 어쩌면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지혜의 눈에 들어온 듯한 낡은 글씨들은 펜으로 여러 번 덧대어지고 얼룩져 있었다. 마치 할머니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1952년, 그 혼란스러운 해의 어느 가을날에 기록된 페이지였다.
미영아, 내 아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이름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피난길은 끝이 없었다. 등에는 어린 동생을 업고, 손으로는 미영이의 작디작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폭격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여 아비규환이었다. 미영이는 고사리 같은 손에 내가 깎아준 작은 나무 새를 쥐고 있었다. ‘언니, 언니는 이 새처럼 날아갈 수 있어?’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던 그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우리는 어느새 한 무리의 사람들과 섞여 강가에 다다랐다. 배를 타야만 했다. 좁은 배에 몸을 싣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넘어뜨리는 아귀다툼 속에서, 나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버텼다. ‘미영아, 언니 손 놓지 마! 절대 놓지 마!’ 수없이 외쳤지만,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결국 미영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비규환 속에서 미영이는 나를 불렀을까. ‘언니!’ 하고 외쳤을까. 아니면, 그 작은 나무 새를 움켜쥔 채 혼자서 낯선 얼굴들 속으로 사라졌을까. 나는 미영이의 얼굴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미 배는 강 한가운데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 강은 마치 내 심장을 두 동강 내는 것처럼 거칠게 흘러갔다.
그 후로 수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강을 다시 찾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고란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는 마을의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혹시, 혹시 그 강가 어디선가, 홀로 남겨진 미영이가 그 작은 나무 새를 품에 안고 나를 기다렸을까. 이 언니가 미련하게도 네 손을 놓쳐버린 그날부터, 내 심장은 단 한 번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구나. 미영아, 내 아가…”
글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잉크가 번져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속에 담긴 절규와 통한은 활자를 넘어 지혜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이토록 직접적으로 고통을 토로하는 대목은 드물었다. 늘 강인하고 지혜로웠던 순임 할머니가 평생을 품고 살았던 아픔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었다. 잃어버린 여동생, 미영. 그 이름과 ‘고란사’라는 어렴풋한 단어가 지혜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단 하나의 실마리, 고란사
지혜는 몇 년 전, 할머니와 함께 오래된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던 기억을 더듬었다. 잊힌 사찰과 한국 전쟁 중 피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화면에 비친 낡은 절의 모습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셨고, 지혜가 물어도 그저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다”라고만 답했었다. 그 절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고란사’와 비슷한 울림을 가진 이름이었다.
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켰다. ‘고란사’를 검색하자 익숙한 이름이 떴다. 충청남도 부여에 위치한 작은 암자. 백마강을 끼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었던 곳이라는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몇 년 전 자신이 보았던 다큐멘터리 속 그 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단 하나의 실마리, ‘고란사’. 어쩌면 그 강가, 그 절 근처에 미영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지혜의 가슴을 쿵쿵 울렸다. 잃어버린 이를 찾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의 평생을 짓눌렀던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걷어낼 수 있다면, 지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지혜는 조용히 짐을 꾸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여정은 오로지 자신과 할머니, 그리고 잃어버린 미영이만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마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듯, 지혜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작은 가방 깊숙이 넣었다. 그 안에는 할머니의 아픔과 지혜의 간절한 소망이 함께 담겨 있었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지혜의 머릿속에는 일기장의 글귀들이 메아리쳤다. ‘언니 손 놓지 마! 절대 놓지 마!’ 그 어린 미영이의 절규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로 접어들자,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백마강이었다. 강물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지만, 지혜에게는 할머니의 눈물처럼 아득하고 슬프게만 느껴졌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오래된 돌담과 고즈넉한 한옥들이 눈에 띄었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내비게이션은 ‘고란사’ 입구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강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강물 위로 유람선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혜의 눈에는 오직 강 건너편의 숲과, 그 안에 숨겨진 절의 모습만이 들어왔다.
고란사는 생각보다 작고 아담한 암자였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지혜는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길가의 흙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발자국에 닳아 윤이 나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할머니의 아픔이 이 길 위에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수십 년 전, 어린 순임과 미영이가 이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작은 계단을 오르자 고란사의 법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함 속에 새소리만이 들려왔다. 법당 옆에는 작은 종각이 있었고, 그 옆으로 오래된 고란약수터가 보였다. 지혜는 약수터 옆 바위에 새겨진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한 노보살님이 바가지로 약수를 뜨고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보살은 지혜를 한번 흘긋 보더니 다시 약수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지혜는 용기를 내어 노보살에게 다가갔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이곳에 오래 사셨나요?”
노보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 벌써 아흔이 가까워 오네.”
지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혹시, 오래전, 그러니까 한국 전쟁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 중에 어린 여자아이를 기억하시는지요? 작은 나무 새 인형을 들고 다녔던 아이 말입니다. 미영이라고…”
노보살의 눈빛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강 건너편을 응시했다. 마치 기억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나무 새 인형을 가진 아이라… 아, 그 아이 말인가. 어렴풋이 기억나는구나. 그때는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지. 수많은 아이가 부모를 잃고 헤매었고, 부모들은 아이를 잃고 울부짖었어. 그 아이도 아마 그랬을 거야. 늘 강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 그 나무 새를 품에 꼭 안고 있었지. 이 고란사에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들었으니… 이름이 미영이라고 했던가.”
지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노보살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잃어버린 동생 미영이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혜는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지혜는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노보살은 약수터 옆,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아래에, 그때 당시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이름과 간략한 사연을 적어둔 돌탑이 있단다. 이 절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다시 가족을 찾아 떠난 이들도 있지. 오래전 스님께서 혹시라도 나중에 가족이 찾을까 하여 정성껏 기록해 두신 것이지. 전쟁의 상흔을 잊지 말자는 의미도 있었고…”
지혜는 노보살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듯한 작은 돌탑이 있었다. 돌탑의 표면은 닳고 닳아 글씨가 희미해져 있었지만, 지혜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표면을 쓸어내렸다. 수많은 이름들이, 잊힌 사연들이 그 돌탑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혜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돌탑의 한쪽, 다른 글씨보다 조금 더 깊게 새겨진 듯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어린아이가 새겼을 법한 작은 나무 새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김미영 (金美英) – 평양 출신. 언니 순임을 찾음. 나무 새를 지님. 1952년 가을 고란사에서 머물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떠남.>
지혜의 손끝이 떨렸다. 미영. 할머니의 동생 미영이 분명했다. ‘남쪽으로 떠남’. 그 문장이 지혜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미영이는 죽지 않았다. 살아서, 어딘가 남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평생을 짓눌렀던 절망의 사슬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문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미영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과연 살아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지혜는 돌탑에 손을 얹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물은 여전히 유유히 흘러갔고, 그 강물 위로 시간의 무게가 실려 내려앉는 듯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이제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지혜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 장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