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의 맹세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맥의 능선조차 눈보라에 희미해져 수묵화의 번짐처럼 아득했다. 서연은 고요히 창가에 앉아 내리는 눈을 응시했다. 무수한 눈꽃들이 허공에서 춤추듯 내려앉아 대지를 덮는 모습은 마치 시간을 잊은 듯한 영원의 춤사위 같았다. 하지만 서연의 마음속은 그 설경만큼이나 고요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천 개의 칼날이 난무하는 전장처럼 번민으로 가득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70년 전,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쏟아지던 겨울날, 서연은 북풍을 맞으며 작은 손을 잡고 맹세했다.
‘무엇이 되었든, 이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때는 순진했고,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랑하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고,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따뜻한 차를 든 예나의 그림자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방안에 길게 드리워졌다. 조용히 다가온 예나는 찻잔을 서연의 곁에 놓으며 말했다.
“할머님, 깊이 생각에 잠겨 계시군요. 오늘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립니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예나를 보았다. 예나의 맑은 눈빛 속에는 걱정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슬픔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어쩌면 예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이 집안을 대대로 옥죄어 온, 혹은 지탱해 온 그 거대한 약속의 그림자를.
“예나야, 이 눈을 보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 제각기 다른 길을 내려오지만, 결국은 하나의 눈으로 쌓여 세상을 덮는구나.”
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나무껍질처럼 거칠지만, 그 안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
예나는 서연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창밖의 설경만이 유일한 배경이었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조각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서연은 얇은 옷차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붉게 상기된 두 뺨에는 눈물인지 눈송이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희고 작은 손을 내민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깊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서연아, 제발… 이대로는 안 돼. 우리 모두 사라져버릴 거야.”
“아니야, 언니. 내가 약속할게. 내가 어떻게든 모두를 지킬게. 이 눈이 녹지 않는 한, 이 약속은 변치 않을 거야.”
서연은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가운 손과 손이 맞닿아 떨렸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유난히 크고 아름다운 눈꽃 하나가 떨어져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신의 축복처럼, 혹은 거대한 운명의 서막처럼.
그 기억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어제 일 같았다. 서연은 눈을 떴다. 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님, 그때의 약속이… 그렇게 무거운 짐이셨나요?”
서연은 쓰게 웃었다. “짐이 아닐 리 없지. 지키는 자에게는 삶의 이유가 되고, 어기는 자에게는 영원한 속죄가 되는 것. 그것이 약속이란다. 특히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맺은 약속은… 더욱 그랬지.”
변질된 서약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서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약속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단다. 우리 가문을 지키고, 잊혀 가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주겠다는… 그런 맹세였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욕망이 섞여들면서, 약속은 본래의 의미를 잃기 시작했지.”
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는 말씀은…?”
“희망을 되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망을 앗아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어.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지키지 않아도 될 것들을 가두고, 심지어는 파괴하기까지 했지. 모두가 약속의 수혜자가 될 줄 알았지만, 결국은 소수의 이득만을 위한 거대한 속박이 되고 말았다.”
서연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저택 너머로 펼쳐진 설원 어딘가에, 오랫동안 잊혀 있던 진실이 묻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진실은 눈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오늘 밤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꿈틀거리며 되살아나 서연의 심장을 옥죄었다.
“며칠 전, 자네가 가져온 그 소식 말이다… ‘검은 장미’의 발현. 그것은 약속의 균열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증거야.”
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검은 장미’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불길한 징조였다. 약속이 더 이상 본래의 의미를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해악을 끼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표식.
결정의 순간
“할머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려는 건가요?” 예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서연은 천천히 일어섰다. 허리가 굽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마치 겨울의 혹독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고목처럼 강인해 보였다.
“나는 이 약속을 맺은 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다. 또한 이 약속의 폐해를 가장 깊이 깨닫고 있는 자이기도 하고.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예나는 놀란 눈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약속을 끝낸다는 것. 그것은 가문을 해체하고, 모든 기반을 뒤엎으며, 어쩌면 서연 자신마저도 희생해야 하는 길일지도 몰랐다.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하지만 할머님, 그 약속은… 저희 가문의 근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저희는…”
“근간이라… 썩어버린 근간은 잘라내야 하는 법이지. 더 이상 불의를 명분 삼아 순수했던 약속을 욕되게 할 수는 없어.”
서연은 창밖의 설경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저 눈송이들이 언젠가는 녹아내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이 오래된 약속 또한 한 시대의 끝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해빙을 맞이해야 할 터였다.
“예나야, 내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저 산을 오를 준비를 하렴. 우리가 잊고 있던,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했던 그 진실의 장소로 가야 한다.”
서연의 손이 서늘한 창문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깨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70년 전, 눈꽃이 내리던 날 맺었던 그 순수한 맹세가, 이제서야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는 것처럼. 혹은, 그 약속의 종말을 고하러 오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고요한 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속 저택에서, 한 노인의 결단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묵직한 파문을 일으켰다. 제1212화의 밤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