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234화

깊고 푸른 산자락에 기댄 작은 마을, 서릿발 같던 겨울의 흔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가지 끝에서 돋아나는 여린 새잎들은 연두빛 실루엣을 그렸고, 꽁꽁 얼었던 시냇물은 졸졸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처럼 투명하게 흘러내렸다. 이지혜는 낡은 한옥 처마 아래 툇마루에 앉아 멀리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스산한 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애틋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햇수로 따지면 벌써 십 년이었다. 열 살배기 동생 은서가 감쪽같이 사라진 지. 마을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며 위로했지만, 지혜에게 시간은 그저 상처 위에 겹겹이 쌓이는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봄은 매년 찾아왔고, 그 따스한 기운은 마치 잊으라 재촉하는 듯 그녀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했다. 그러나 올해의 봄바람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결마다, 잊혀진 약속의 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다.

새벽 이슬 같은 예감

그날 새벽, 지혜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은서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으며 들꽃 가득한 언덕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꿈은 늘 희망을 주었다가 아침이면 차가운 현실로 변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잠시 후, 지혜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마을의 어른이자 지혜에게는 친정아버지 같았던 김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가 걷힌 듯한 기묘한 상기됨이 서려 있었다.

“지혜야, 봄바람이… 기별을 가져왔더구나.”

김 노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떨렸다. 지혜는 영문도 모른 채 노인을 따라 작은 안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마을에서 가장 고령으로 손꼽히는 박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박 할머니는 평생을 산 아래 외딴 초가집에서 홀로 살아오신 분으로, 좀처럼 마을에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지혜를 보자마자 차가운 지혜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주름진 손바닥에 꾹 쥐어 주었다. 그 손 안에는 낡고 작은 목각 인형이 들려 있었다.

“이것은… 은서가 어릴 때 아끼던 참새 인형이잖아요.”

지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참새 인형은 은서가 직접 깎고 색칠하여 ‘치르치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었다. 은서가 사라지던 날, 인형은 방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는데, 지금 박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은서가 사라진 직후, 지혜가 마을 주변을 수색하다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또 다른 참새 인형이었다. 두 자매는 똑같은 인형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지혜의 것은 숲에서 잃어버렸었다.

바람이 전한 이야기

“할머니, 이게 어떻게….”

박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에서는 따스한 햇살 아래 봄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며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제저녁이었어. 내가 잠결에 듣는데, 어디선가 여린 새소리가 들리는 거야. 춥지도 않은데 몸이 으스스해져서 잠에서 깨었지. 그런데 마루 앞에 이것이 놓여 있는 게 아니겠니. 꼭 누가 가져다 놓은 것처럼 말이야.”

할머니의 말에 지혜는 숨을 죽였다. 김 노인이 옆에서 조용히 거들었다. “새벽에 할머니가 나를 찾아와 이 인형을 보여주시며, ‘바람이 전하더이다. 깊은 산골, 얼음 계곡 아래, 붉은 꽃 한 송이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셨어. 나는 처음엔 할머니가 노망이 드셨나 했는데, 인형을 보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지. 지혜 너는 기억하겠지, 은서가 사라지던 날 입고 있었던 옷 색깔… 붉은 치마였잖니.”

붉은 꽃. 지혜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은서가 실종되던 날, 그녀는 지혜가 선물해 준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치마는 마치 겨울의 끝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리고 ‘얼음 계곡 아래’라는 말은, 이 마을 뒤편에 있는, 겨울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다는 전설의 계곡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지혜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지난 십 년간 굳게 닫혔던 희망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숨이 막혀왔지만, 동시에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는 듯한 생경한 느낌이었다. 은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토록 간절했던, 그러나 동시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가장 뜨거운 소식이었다.

다시 떠오른 약속

“치르치르… 치르치르….”

지혜는 할머니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인형을 받아들고 품에 안았다. 딱딱한 나무 조각이었지만, 그녀의 품에서는 은서의 체온이 전해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 은서는 늘 지혜를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에게 기대곤 했다. “언니, 나 무서워. 언니가 옆에 없으면…” 어린 은서의 두려움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지혜는 그때마다 은서의 작은 손을 잡아주며 약속했었다. “괜찮아, 은서야. 언니는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아.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찾아낼 거야.”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지혜를 늘 짓눌렀었다. 이제야, 이 봄날, 박 할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와 이 작은 참새 인형이, 그녀에게 다시 약속을 지킬 기회를 주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잊힌 줄 알았던 그 약속을, 봄바람이 다시금 기억하게 해준 것이다.

지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김 노인과 박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제가… 제가 은서를 찾아야겠어요. 얼음 계곡 아래라면, 그곳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김 노인은 지혜의 굳은 의지를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혜야. 이 할애비도 돕겠다. 마을 청년들도 힘을 보탤 게다. 오랜 시간, 너와 함께 은서를 기다려왔으니.”

박 할머니는 지혜의 손을 다시 잡았다. “두려워 마라, 아이야. 봄바람은 길을 알고, 그 길 끝에는 너의 작은 꽃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녀의 눈빛은 깊은 지혜를 담고 있었다. 마치 그녀 자신이 봄바람의 속삭임을 듣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

창밖은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봄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바람은 숲의 나무들을 흔들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지혜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오랜 슬픔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막연한 희망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서를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과,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굳건한 결의였다.

오랜 겨울이 끝나고, 얼어붙었던 대지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듯, 지혜의 마음에도 새로운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참새 인형을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얼음 계곡 아래 숨겨진 붉은 꽃을 찾아 떠날 시간이었다. 그 길고 험난할 여정의 시작을, 봄바람이 따스한 숨결로 축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