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서재는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았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 노을이 길게 드리워졌고, 낡은 책장 사이로 먼지 낀 햇살이 부유했다. 지은은 할머니가 떠나신 지 꼬박 일 년이 되는 이맘때쯤, 유품 정리를 시작했다.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손때 묻은 낡은 일기장을 다시 발견했을 때, 지은의 손끝이 저릿했다. 두꺼운 가죽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모서리는 닳아 반질거렸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지은은 의자에 앉았다. 일기장을 펼치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쌉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수많은 페이지를 넘기다 지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붉은색 동백꽃 한 송이가 조심스럽게 말려 박혀 있는 페이지였다. 이미 바싹 말라 색이 바랬지만, 그 형태만으로도 할머니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날짜는 1958년, 할머니가 스물두 살 되던 해였다. 지은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젊은 시절의 여린 감성이 펜 끝에 스며 있었다.
1958년 5월 12일, 흐림.
런던에서 온 장학금 통지서를 들고 바닷가에 나섰다. 파도가 내 마음처럼 일렁였다. 꿈에 그리던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 붓을 든 내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병석에 누우신 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의 눈망울이 아른거렸다. 내가 떠나면 누가 이들을 돌볼까. 누가 이 집을 지킬까.
나는 그 통지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등대 아래 바위에 앉았다. 그림으로 담고 싶었던 저 푸른 바다, 하얀 등대, 그리고 억척스럽게 피어난 바위틈의 작은 꽃들. 이 모든 것을 내 눈과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어쩌면 내 손으로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은, 평생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은은 할머니의 꾹꾹 눌러쓴 글씨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머니는 늘 자상하고 강인한 분이셨지만, 젊은 시절 이렇게 뜨거운 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은에게 생경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거실에 걸려 있던 낡은 풍경화 한 점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늘 그 자리에 걸려 있던, 평범한 바닷가 풍경이었다. 하얀 등대가 서 있고,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그림. 지은은 그 그림을 그저 시골 풍경화라 여겼을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할머니가 취미로 그린 평범한 그림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기장 속 글귀를 읽는 순간, 지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그림… 등대 그림…’
지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마침내 그림 앞에 섰을 때, 지은은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의 일기장에 묘사된 그 풍경 그대로였다. 일렁이는 파도, 우뚝 선 등대, 그리고 그림 하단 바위틈에 작게 피어난, 이름 모를 하얀 꽃들까지. 할머니의 손길이 닿은 붓질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림 속 바다색은 할머니의 꿈과 젊음의 열정을 머금은 듯 깊고 푸르렀다.
지은은 그림에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프레임을 만졌다. 할머니가 스물두 살에 포기해야 했던 꿈, 그러나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그 간절함이 그림 한 폭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매 순간 치열하게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음을 깨달았다.
그림을 감상하던 지은의 시선이 문득 액자 오른쪽 하단에 머물렀다. 희미하게 파인 듯한 작은 이니셜, 그리고 그 아래 흐릿하게 적힌 날짜. 1958년 5월 12일. 일기장 속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할머니는 그날, 꿈을 포기하는 대신 그 꿈을 그림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생 그 그림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매일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으리라.
지은은 조심스럽게 그림을 벽에서 내렸다. 오래된 나무 액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뒷면을 살펴보니, 낡은 종이로 마감된 곳 한쪽이 살짝 들떠 있었다.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 안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상자 표면에는 할머니가 새긴 듯한 작은 문구가 흐릿하게 박혀 있었다.
‘내 모든 바다.’
지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상자를 열자, 오래된 물감 튜브 몇 개와 닳아버린 붓 한 자루, 그리고 캔버스 조각에 그려진 작은 스케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아래, 누런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글씨체로 쓰여진, 자신에게 보내는 듯한 편지였다. 지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그녀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