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223화

엇갈린 인연의 페이지

밤은 깊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저 멀리 희미해진 시간이었다. 지우는 낡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일기장을 응시했다. 무릎 위에는 방금 전까지 눈물로 얼룩진 이혼합의서 초안이 구겨져 있었다. 준호와의 7년은 견고한 성 같았다고 믿었건만, 어느새 그 성벽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먹먹함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일기장은 밤공기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 이제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듯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온갖 기쁨과 슬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특히 오늘 밤, 지우의 눈길을 사로잡은 페이지는 여느 때보다도 더욱 낡고 빛바랜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침묵으로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해 여름, 잊혀진 약속

1958년 7월 15일, 비가 내렸다.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렸다. 동훈 씨가 떠난다고 했다. 먼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곳으로…

지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할머니의 일기장에는 늘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는데, ‘동훈 씨’라니.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숨을 멈추고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가난한 내 집을 떠나 더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그게 나를 위한 길이라고 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결심은 단단했다. 나는 그저 빗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쥐여준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내 모든 진심이었다. 그 돌멩이에 새긴 나의 이름 ‘순영’… 그가 기억해 주길 바랐다.

할머니의 이름은 ‘순영’이었다. 지우는 할머니가 평생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청춘의 한 페이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동훈 씨?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아련한 추억, 아니, 어쩌면 이별. 지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할머니도 자신처럼, 이토록 아픈 이별을 경험했던 것일까.

나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내게는 가족이 있었다. 병든 어머니, 어린 동생들. 그가 떠나는 길을 막는다는 것은, 그에게 짐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모든 꿈을, 나의 모든 사랑을, 그날의 빗속에 묻었다.

지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머니는 그 젊은 날,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했던가.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뒤로하고 가족을 택했던 할머니의 삶. 지우는 자신의 구겨진 합의서를 내려다보았다. 준호와 헤어지는 것이 과연 그녀만의 고통일까. 할머니는 억지로 잊어야 했던 사랑이 있었고, 그것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날 밤, 지우는 일기장을 덮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할머니의 침묵 속에 감춰져 있던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준호와의 관계는 어쩌면 할머니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별의 무게, 놓아줘야 하는 아픔은 시대를 초월하여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지우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어딘가 모르게 후련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여전히 저릿했다. 식탁 위에는 할머니가 아끼던 오래된 자개함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다.

자개함 속 또 다른 비밀

함 속에는 색이 바랜 사진 몇 장과 함께, 반질반질한 검은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작은 조약돌에는 희미하게 한글이 새겨져 있었다.

순영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읽었던 그 ‘작은 돌멩이’였다. 그리고 그 돌멩이 옆에는 또 다른 종이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펼쳐보니,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편지였다.

순영에게. 나는 먼 곳으로 떠나지만, 그날 빗속에서 네가 준 돌멩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이 새겨진 이 돌멩이처럼, 너는 내 마음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다. 부디 너의 삶이 행복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나는 언젠가, 네게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을 것이다. – 동훈

편지에는 날짜가 없었다. 지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머니는 평생, 이 돌멩이와 이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향한 사랑과는 별개로, 젊은 날의 아픈 인연을 그렇게나 소중히 품고 살아온 할머니의 모습이 지우의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할머니의 선택은 희생이었지만, 그 안에는 순수하고 절절한 사랑이 함께 있었다. 그 사랑은 결코 잊힌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할머니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지우는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차갑지만 묘하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할머니의 이 깊은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준호와의 헤어짐이 마냥 자신만의 비극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의 준비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간직하는 것이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지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이혼합의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 어젯밤의 비극적인 감정 대신, 어떤 담담한 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사랑을 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그 사랑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할머니의 지혜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호…” 지우는 낮게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도피하거나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만 존중과 사랑을 담아, 그녀의 다음 페이지를 써 내려갈 결심을 했다.

창밖에서는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이제 지우에게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길을 밝혀주는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지우는 그 페이지를 어떻게 채워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