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거실 창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안온한 실내의 온기를 침범하진 못했다. 지후는 세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세아는 그런 지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의 이마에 맺힌 작은 주름들까지 사랑스럽게 훑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란이 이 작은 공간에는 닿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네요, 모든 게.” 지후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낮 동안의 피로와 함께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세아는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희미해졌다. 며칠 전, 정리하지 못했던 지후 어머니의 유품 상자를 열었을 때 발견한 한 장의 사진과 낡은 일기장이 그녀의 마음속 고요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지후 어머니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여인이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옆에는, 지후와 놀랍도록 닮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일기장은 낡았지만, 글씨체는 또렷했다. 어머니의 글이었다. 세아는 지후가 잠든 밤마다 몰래 일기장을 펼쳐 읽었다. 숨이 멎는 듯한 고백들이 이어졌다. 지후의 어머니에게는 지후 외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는 것. 아니, 정확히는 지후의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쌍둥이 동생, 서희 이모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지후는 외동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일기장 속에는 지후 어머니가 서희 이모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조카를 비밀리에 돌보고, 그 아이를 지후의 존재로부터 철저히 감추려 했던 지난한 세월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아이의 이름은 ‘하준’. 지후 어머니의 글에 따르면, 하준은 현재 스물다섯 살. 지후보다 겨우 세 살 어린 남자였다. 그리고 그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지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남긴 듯한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후야, 언젠가 하준이를 만나게 되면….’
세아는 자신이 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지후의 가장 깊은 비밀의 심연을 제멋대로 들여다본 기분. 지후는 어머니를 늘 홀로 강인하게 살았던 완벽한 어머니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삶을 숭고하게 여겨왔는지 세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진실은 지후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세상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동생의 아들을 어머니가 몰래 돌봐왔다는 것. 왜 숨겼을까? 왜 지후에게는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지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췄다. 그의 이마, 코끝, 그리고 다정하게 다물린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토록 평화로운 얼굴 뒤에, 자신의 뿌리에 대한 거대한 미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세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사실을 지후에게 알려야 할까? 아니면 영원히 침묵해야 할까?
진실은 때로 잔인했다. 지후의 과거와 어머니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하준이라는 존재는 지후의 잃어버린 가족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후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형제 관계를 줄 수도 있었다. 그 미지의 인연, 밤기차에서 처음 만났던 지후처럼, 또 다른 ‘낯선 인연’이 그의 삶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그 인연의 문을 열어야 할지, 영원히 닫아두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세아 씨, 무슨 생각해요?” 지후가 나른하게 눈을 뜨며 물었다. 그의 눈에는 세아를 향한 깊은 애정이 가득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세아의 심장이 더욱 세게 요동쳤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이 엄청난 무게의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세아는 애써 미소 지었다. “아니요, 그냥…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지후는 그저 세아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깍지를 꼈다. 그의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들어왔지만, 세아의 마음속 차가운 공포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기장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단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감. 혹은 지후의 어머니가 남긴 ‘하준’이라는 이름이 현실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녀는 지후의 손을 꼭 잡았다. 이 관계의 다음 페이지를, 이 가족의 다음 장을, 이제는 자신이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세아의 결심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진실은 결국, 드러나야만 하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