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94화

낡은 일기장은 언제나 그랬듯, 마른 국화꽃 향기와 세월의 무게가 배어 있는 종이 냄새를 풍겼다. 나의 손끝에 닿는 얇고 바스락거리는 종이 한 장 한 장에는 할머니의 지나온 삶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속삭임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오늘 내가 펼쳐 든 페이지는 유난히 색이 바래고 얼룩이 져 있었다. 잉크가 번진 자국은 마치 할머니의 눈물이 마른 흔적 같기도 했다.

날짜는 1958년 11월 2일. 기록의 시작은 한파가 들이닥치던 그해 겨울, 모두가 힘겨워했던 시절을 묘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필체는 때로는 단정했지만, 이 날의 기록은 어딘가 불안하고 흔들리는 듯했다. 구불구불한 글씨는 그때의 할머니의 마음처럼 위태로웠으리라.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마당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칼바람에 신음하고, 아궁이에서는 연기 대신 희망마저 사그라드는 듯했다. 아이들은 얇은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잠들어 있었다. 내 배도 등에 붙은 지 오래였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건넛집 김 할멈네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사흘째 밥 냄새가 나지 않았다. 전쟁 후, 모두가 어렵다고 했지만 김 할멈네는 특히 더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 셋을 키우는 그이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저려왔다.”

할머니의 글은 차분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당시의 절박함과 연민은 내 심장을 옥죄어 왔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늘 온화하고 조용했지만, 그 시대의 할머니는 얼마나 거친 세파를 견뎌냈을까. 김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장에 걸쳐 언급되었지만, 이날의 기록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 손목에는 어머니께 물려받은 옥팔찌가 있었다. 갓 시집왔을 때, 어머니는 내게 이것을 건네며 ‘이것은 너의 부적이며, 언젠가 네 삶을 지탱해 줄 지팡이가 될 것’이라 하셨다. 단 한 번도 내 손목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귀한 것이었다. 이 팔찌를 팔면 최소 한 달은 김 할멈네 식구들이 굶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게도 이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며칠 밤낮을 잠 못 이루고 고민했다. 아이들이 잠든 고요한 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마치 내 망설임을 꾸짖는 듯했다. 어미의 유품을 팔아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인가, 아니면 이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허망한 인간의 길인가.”

할머니의 고뇌가 글자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 그것은 단순히 값비싼 장신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얽힌,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닻이었으리라. 과연 할머니는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나는 숨을 들이켜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새벽녘, 아이들의 마른 기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때였다. 나는 팔찌를 벗었다. 차갑던 옥의 감촉이 내 손 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이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삶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어려운 이를 보듬는 것이 진정한 부적임을 깨달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나는 팔찌를 소중히 싸 들고 읍내 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속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장터의 한편, 낡은 좌판을 벌인 노인에게 팔찌를 건넸다. 노인은 말없이 옥팔찌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낮은 한숨과 함께 돈을 내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돈이었지만, 나는 그 돈을 움켜쥐고 주린 배를 채울 쌀과 김 할멈네 아이들에게 필요한 약을 샀다. 해가 지기 전, 나는 김 할멈네 문 앞에 조용히 쌀과 약봉지를 놓아두었다. ‘멀리 사는 친척이 보낸 것이니 부디 받으시게’라는 쪽지도 함께. 아무도 보지 못하게, 나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손목은 허전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내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아, 할머니. 할머니는 그 작은 손목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가장 큰 가치를 지켜내신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보상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 옥팔찌가 지탱한 것은 할머니의 삶뿐만이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의 이웃의 삶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가족에게 물려진 숭고한 사랑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일기장을 덮었다. 내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피어났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직장 동료와의 작은 오해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그저 내 상처만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나의 작은 자존심과 감정 때문에, 관계는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그 시절 희생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며, 나의 고집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

할머니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면서도, 그 행위를 통해 오히려 더 큰 평안과 기쁨을 얻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자존심, 나의 오만함, 나의 편협한 시선들. 어쩌면 나도 할머니처럼, 내 안의 ‘옥팔찌’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내 마음속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어둠 속에 숨어 이웃을 돕고는 편안히 잠들었다던 할머니의 그 마음이, 지금의 나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나는 동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작은 용기가, 내 삶의 또 다른 ‘옥팔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오늘 밤도 나에게 잊지 못할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기나긴 이야기의 다음 장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