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옅은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지만, 미연의 방은 어둠과 한숨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방에서는 낮게 울리는 기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잠시 잠들었던 미연은 그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뒤척였지만, 한번 깨진 잠은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어머니의 흐릿해져 가는 기억, 점점 더 희미해지는 눈빛, 그리고 자신에게 켜켜이 쌓여가는 피로와 막막함으로 가득했다.
이러다 나도 엄마처럼 되는 건 아닐까. 아니, 엄마보다 먼저 지쳐 쓰러지는 건 아닐까. 미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놓인 낡은 일기장을 응시했다. 밤늦게 잠 못 이루는 날이면, 할머니의 오래된 글씨 속에서 작은 위안을 찾곤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딘 낡은 종이장마다 할머니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글씨들은 마치 아득한 옛날의 비밀스러운 속삭임 같았다. 오늘따라 손가락이 멈춘 페이지는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닳아 유독 더 낡아 보였다. 날짜는 희미했지만, 그 옆에 적힌 단어들은 선명했다. ‘어머니의 눈물, 나의 선택.’
흐려지는 기억의 숲에서
할머니, 옥자 할머니의 글은 여느 때보다도 가슴을 저미는 듯했다.
“정월 대보름, 읍내 장터는 왁자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어머니의 시선은 공중에 흩어져 있었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먼 이국땅에서의 학업… 그 꿈을 향해 나아갈 기회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미연은 글 속의 할머니와 자신을 겹쳐 보았다. 할머니의 어머니, 즉 증조할머니도 치매를 앓으셨던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의 조각들이 바람처럼 흩어지는 고통, 그 속에서 가족들이 느끼는 막막함은 시대를 넘어 공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말씀하셨지. ‘옥자야, 네 삶은 너의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돌볼 테니, 너는 네 꿈을 쫓으렴.’ 하지만 어머니의 슬픈 눈빛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낯선 사람에게 의지해 생경한 나날을 보내야 할 어머니를 상상하니,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내 안에서 꿈과 효심이 잔인하게 맞붙어 싸우는 기분이었다.”
미연은 할머니의 글을 읽으며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그녀 역시 가끔, 아주 가끔은,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그녀를 짓눌렀다. 할머니도 그러셨구나. 이 깊고 어두운 감정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새로운 길목에서 마주한 희미한 등불
“나는 결국, 떠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하늘에 뜬 보름달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꿈을 포기한 회한의 눈물인지, 어머니 곁에 머물게 된 안도감의 눈물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미연은 펜 자국이 진하게 남은 그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꿈을 포기한 회한의 눈물인지, 어머니 곁에 머물게 된 안도감의 눈물인지.’ 그 복잡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할머니는 그 후 어떻게 살아가셨을까. 포기한 꿈에 대한 미련 없이, 어머니를 돌보는 삶에서 만족을 찾으셨을까.
“시간은 흐르고, 어머니는 이제 나를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내 손을 잡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온기가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읍내 작은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글을 깨치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내 안의 빛을 발견했다. 먼 이국땅의 학업은 아니었지만, 이 땅에서 나름의 배움을 나누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일기장 속 할머니의 글은 거기서 멈췄다. 미연은 일기장을 덮었다. 가슴 속에 먹먹하게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거대한 선택 앞에서 자신을 희생했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의미와 기쁨을 찾아내셨다. 포기한 꿈에 대한 후회는 있었을지언정, 그 삶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글은 담담히 증명하고 있었다.
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어머니는 색색의 천 조각을 모아 만든 낡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린 채 깊이 잠들어 계셨다.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웠다. 미연은 어머니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전해졌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말해주었다. 삶은 단 하나의 길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멈춰 서야 할 때가 있고, 돌아가야 할 때도 있지만, 그 길 위에서 새로운 희미한 등불을 발견할 수 있다고. 내 안의 꿈이 좌절되더라도, 그 순간이 끝이 아님을.
미연은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내일 아침, 여전히 어머니는 어제의 이야기를 되풀이할 것이고, 때때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연은 오늘 밤 할머니의 글에서 얻은 작은 용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길 위에서, 자신 또한 할머니처럼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새벽하늘이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