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241화

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창밖은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로 옛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지원은 난로 옆에 놓인 낡은 목각 인형을 바라보았다. 손때 묻은 인형은 어느 겨울날, 서윤과 함께 깎았던 것이었다. 투박했지만 서로의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날,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던 그날,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리라 맹세했었다. 작고 어린 손을 맞잡고, 눈꽃처럼 부서질 것 같은 약속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약속은,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나무뿌리처럼 지원의 삶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늘 잔인했다. 눈꽃처럼 순수했던 약속 위로 수많은 상처와 오해가 쌓여갔다. 서윤이 사라진 후, 지원은 그 약속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다. 지켜야 할 것은 점점 늘어났고, 버려야 할 것은 감히 손댈 수조차 없었다. 오늘 밤, 그 약속의 종착역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현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손에 들린 낡은 서류철은, 이 모든 혼돈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찾았어, 지원아. 서윤의 흔적을.” 현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갈라졌다. 그러나 지원은 그 목소리 속에 숨겨진 절박함을 놓치지 않았다.

지원의 심장이 요동쳤다. 수년간 찾아 헤매던 서윤의 흔적.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진실의 문을 열 열쇠가 될 터였다.

“어디에…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순간이었음에도,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숨이 막혔다.

현우는 탁자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낡고 바랜 종이들 위로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서윤의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어. 우리가 찾지 못하도록, 아니, 우리가 찾지 않도록 말이야.”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라지려 했어. 너와의 약속까지도…”

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서윤은 약속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약속이 자신을 지탱해온 전부였으니까.

“말도 안 돼… 서윤이는 그럴 리 없어.” 지원은 서류철을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종이의 감촉이 마치 서윤의 차가운 마음 같았다.

“그녀는 병들었어. 오랫동안 앓아왔어. 그리고… 그 병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어.” 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의 과도한 보호, 너의 그림자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어. 너의 사랑이 그녀를 질식시켰다고 생각했어.”

지원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서윤에게는 고통이었단 말인가?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순수하게 맺었던 약속이 어쩌다 이토록 뒤틀리고 만 것일까.

그날의 순백색 눈밭 위에 함께 서 있던 두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빛이 되어주자.” 서윤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이제 비수가 되어 지원을 찔러왔다.

“어디에 있어.” 지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네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어. 마지막까지…”

“그래도 가야 해.” 지원은 창밖의 눈보라를 응시했다. “그것이 설령 나를 부정하는 길일지라도,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약속이니까.”

현우는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 역시 지원의 결심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지만, 지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발밑의 눈은 푹푹 파묻히며, 그들의 흔적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마치 그들의 오랜 약속처럼, 지워지고 다시 쌓이는 시간의 겹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길, 그 끝에 서윤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지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불씨만이 그를 이끌었다. 그 불씨는 한때 순수했던 약속의 잔해였고, 이제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슬픔과 후회의 불꽃이었다.

이 길의 끝에서, 서윤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까. 미움일까, 체념일까, 아니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과거의 온기일까.

지원은 주머니 속의 낡은 목각 인형을 꽉 움켜쥐었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마치 세상이 그들의 마지막 대면을 막으려는 듯이. 하지만 지원은 알았다. 이 길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 새로운 해빙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혹은, 영원한 얼음 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