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장맛비는 끈질겼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은 세상의 모든 미련을 씻어내려는 듯 보였지만, 강준의 마음속 응어리진 그리움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낡은 노트 한 권을 앞에 두고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노트에는 서연이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이제는 희미해진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수없이 들여다봐 닳아버린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강준의 심장을 헤집어 놓았다.
카페 문이 열리고 맑은 풍경종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낯선 여인이 들어섰다. 잿빛 스카프를 두른 단정한 차림의 그녀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카페 안을 둘러보다 강준과 눈이 마주쳤다. 강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지은 씨. 서연이 잠시 일했던 편집부의 선배였다는 그녀와의 만남은, 오랜 갈증 끝에 찾아온 한 모금의 물과 같았다. 하지만 그 물이 어떤 맛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오래된 기억, 새로운 조각
이지은 씨는 강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주문한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계심과 깊은 회한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강준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강준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이지은 씨는 명함을 받아 들었지만, 시선은 강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서연이 때문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강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 시간 찾고 있습니다. 벌써…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그저 눈빛으로 그 그리움의 깊이를 드러냈다. 이지은 씨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듯 흘러내렸다.
“서연이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아이였어요. 착하고, 밝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죠.”
강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은 아이였다’는 과거형 표현이 불길한 예감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엇갈린 삶의 고비
이지은 씨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연이가 우리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정말 희망에 차 있었어요. 미래를 이야기하고, 꿈을 꾸고… 그런데 갑자기 그만두었죠.”
“갑자기요?” 강준이 되물었다. 서연이 사라졌을 당시, 그는 그녀가 일하던 곳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퇴사한 뒤였다. 그때는 그저 그녀가 잠적하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고만 생각했다.
“네. 정확히는… 집안에 큰일이 생겼어요.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지셨거든요. 그 일로 서연이는 모든 걸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힘든 상황이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죠.” 이지은 씨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강준은 눈을 감았다. 그는 서연이 사라진 이유를 수없이 추측해왔다. 자신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했거나, 다른 누군가를 만났거나, 혹은 그저 연락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어머니의 위독’이라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였다.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신이 그녀를 찾을 때, 그녀는 이미 세상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서연이,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요. 밤마다 몰래 울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늘 밝은 척했죠. 특히… 당신 이야기를 종종 했어요.”
강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제… 이야기요?”
이지은 씨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네. 헤어진 첫사랑인데,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온다고요. 미안하다고, 너무 고맙다고… 그런데 자신 때문에 그 사람이 불행해질까 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 순간, 강준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지난 세월의 모든 서러움과 그리움,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된 서연의 깊은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자신을 잊었거나, 혹은 그저 사라지고 싶어 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을 위해 홀로 아픔을 감당했던 것이다.
남겨진 조각, 새로운 길
강준은 애써 눈물을 닦았다. “지금… 서연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지은 씨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연이는 고향을 떠나 정말 모든 연락을 끊었어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건… 아주 조용한 곳에서,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자연과 가까운 곳이요. 어쩌면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자연과 가까운 곳…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강준의 머릿속에 서연의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녀는 늘 푸른 들판과 맑은 강을 좋아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평화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은 씨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작은 책갈피 하나를 꺼냈다. “서연이가 떠나기 전, 저한테 선물해 준 거예요. 작은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죠. 그때 서연이가 그랬어요. ‘이 꽃처럼, 저는 어디든 뿌리내려 살 수 있을 거예요’라고요.”
강준은 책갈피를 받아 들었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보관된 책갈피 위에는 이름 모를 작은 야생화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꽃을 통해 서연의 굳건한 의지와 여린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이것뿐입니다. 죄송해요. 하지만 서연이는… 당신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마음 한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서연이 단순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숨긴’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숨김에는 깊은 사랑과 배려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강준은 이지은 씨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카페를 나섰다. 빗속을 걷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제는 방향을 잃은 방황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은 새로운 단서, ‘자연과 가까운 곳’이라는 막연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향해 뛰고 있었다. 서연은 그를 잊지 않았고, 그를 위해 스스로 고독을 택했다. 이제 그는 그녀가 남긴 꽃 그림처럼, 그녀의 삶의 조각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주 가까운 곳에, 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는 강준의 얼굴을 차갑게 식혀주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불씨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1246화, 그의 탐정 인생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