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398화

세월의 더께가 앉은 먼지투성이 거리를 지훈은 또다시 헤매고 있었다. 398번째의 발걸음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희망만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무수한 거짓된 실마리, 희망고문, 그리고 좌절이 쌓여 그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웠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그의 삶의 의미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민서, 그의 첫사랑. 그 이름 석 자는 여전히 그의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파편이었다.

이번에 그가 찾아든 곳은 서울 변두리의 낡은 골목 안쪽에 숨어있는 고물상이었다. 간판도 없이, 그저 허물어져 가는 창고처럼 보이는 곳. 며칠 전, 익명의 제보자가 던져준 한마디가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오래된 자개장 안에 음악 상자가 있더군요. 당신이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비좁은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세월의 흔적과 사람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물건들. 낡은 가구, 빛바랜 액자, 깨진 도자기…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침묵하고 있었다. 지훈의 시선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이미지, 민서의 손때가 묻은 작은 음악 상자만이 가득했다.

수많은 서랍장을 열어보고, 쌓여있는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가기를 몇 시간. 그의 허리는 쑤시고, 손은 먼지로 시커멓게 변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저 안쪽 구석, 거대한 자개장 뒤편에 거의 가려져 있던 낡은 서랍장 하나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한 불빛 아래, 서랍장의 맨 위 칸에 놓인 물건 하나가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의 심장이 그렇게 울리는 소리를 그 자신만 들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채, 빛바랜 칠이 벗겨진 나무 음악 상자. 다른 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상자 뚜껑에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숲에서 함께 보았던, 희귀한 보라색 난초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민서가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지훈이 목공예를 배우며 정성껏 깎아 선물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음악 상자였다.

지훈의 손끝이 조각된 난초의 윤곽을 더듬었다. 메마른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수많은 곳을 헤맨 끝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토록 상징적인 물건을 발견하다니. 그의 손은 떨렸다. 차마 상자를 열어보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상자를 열면, 민서의 흔적이,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 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진실이 두려웠다.

그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물상 주인이 나타났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늙은 남자였다. “찾는 게 있었나 보구먼.” 그의 목소리는 텁텁했지만, 왠지 모를 정이 느껴졌다. 지훈은 손에 든 음악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이… 이거, 어디서 나신 건가요?”

주인은 지훈의 손에 들린 상자를 잠시 응시했다. “아, 그거 말이지. 몇 해 전에 한 아가씨가 맡기고 간 거야. 시골 어느 작은 마을에서 왔던 아가씨인데,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잠시 맡아주고 돈을 좀 내어줬지.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네.”

시골 마을. 몇 해 전. 아가씨.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그 아가씨…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 이름은요?”

주인은 턱수염을 쓸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름은 딱히 기억이 안 나네. 그냥 ‘조용한 아가씨’라고 불렀는데. 키는 그리 크지 않고, 머리카락은 길었어. 눈매가 아주 깊고 슬퍼 보였지. 왠지 모르게 아픈 사람 같았어.”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머릿속에 민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늘 조용하고,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해 전이라면, 그들이 헤어진 후의 시간이었다. 아픈 사람 같았다는 말에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아가씨…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니면… 어떤 단서라도…” 지훈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갈라졌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어디로 간다고 딱히 말한 적은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아가씨가 맡기고 간 물건이 또 하나 있었지. 편지 같은 건데, 어차피 찾으러 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버리려다 말았어. 잠시만.”

주인은 낡은 서랍을 열고 한 장의 바랜 종이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얇은 종이였다. 종이 위에는, 익숙한 글씨체가 흘러내리듯 쓰여 있었다. 민서의 글씨였다. 지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종이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펼쳤다.

‘…이 작은 음악 상자만이, 내가 온전히 나였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겠죠. 그 모든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오직 이 소리만이 나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잠시 이별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다른 이름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북쪽의 찬 바람이 모든 것을 씻어내 주길 바라며… 제 그림들 속에서, 제가 찾고 싶었던 평화를 찾아 떠납니다.’

손글씨는 중간중간 흐릿해져 있었고, 얼룩진 부분도 있었다. 아마도 눈물자국 같았다. ‘다른 이름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구절이 지훈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다는 뜻인가? 혹은, 어떠한 이유로 과거를 지워야만 했다는 의미일까? 그리고 ‘북쪽의 찬 바람’, ‘제 그림들 속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민서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림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을 줄이야. 지훈은 북쪽의 찬 바람이 부는 곳을 떠올렸다. 강원도? 혹은 더 북쪽의 어딘가? 그녀는 그림을 통해 평화를 찾으려 했다. 그럼 그녀는 지금, 어느 곳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을까?

지훈은 음악 상자를 품에 안고 고물상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했고, 아픔 속에 살았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실마리, 구체적인 방향이 생겼다. ‘북쪽’, 그리고 ‘그림’. 이 두 단어가 그의 눈앞에 새로운 지도를 펼쳐주었다.

오랜 시간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지훈은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음악 상자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상자의 차가운 나무 감촉이 마치 민서의 손을 잡는 듯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절망 속에 피어난 한 가닥 희망. 398번의 좌절 끝에, 그는 마침내, 다시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민서. 이 음악 상자가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질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