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267화

햇살이 연둣빛 새싹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던 그날, 은주 할머니는 낡은 툇마루에 앉아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겨울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이제 막 푸른 기운을 되찾으려 애쓰는 풍경은, 마치 수십 년을 묵묵히 살아온 그녀의 삶과 닮아 있었다. 봄바람은 고요한 산자락을 휘감아 내려와 뜰 안의 매화나무 가지를 살랑였다. 분홍빛 꽃잎 몇 장이 바람에 실려 툇마루 아래로 나지막이 내려앉았다.

은주 할머니의 눈은 흐릿했으나, 마음속 풍경은 여전히 선명했다. 시간의 강물에 휩쓸려 사라진 줄 알았던 얼굴들이 간혹 물 위로 떠오르곤 했다. 특히, 가슴 깊이 묻어둔 한 아이의 얼굴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그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배하곤 했다. 그 아이가 떠난 지 벌써 몇 해던가.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차가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아들, 지훈. 그를 보낸 후로 은주 할머니의 시간은 멈춘 듯 흘렀다.

“할머니, 여기 따뜻한 차 가져왔어요.”

어린 손녀 지유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지유의 맑은 눈망울은 할머니의 모든 시름을 알아차린 듯 깊은 연민을 담고 있었다. 은주 할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차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마치 오래전 아카시아 꽃이 피던 시절의 향기 같았다.

“고맙다, 내 강아지.”

지유는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뜰을 바라보았다. 마당 한쪽에서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이름 모를 풀들이 초록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겨울 동안 메마르고 삭막했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다시 피어나는 모습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그날 오후, 마을 어귀를 지나던 상록 아주머니가 잠깐 멈춰 서서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의 소식을 꿰뚫고 있는 상록 아주머니는 늘 활기찼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소식을 전하곤 했다.

“할머니, 들으셨어요? 건너 마을 이장님 댁에서 잔치가 열린대요. 이장님 조카분이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신다지 뭐예요.”

은주 할머니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의 잔치는 늘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흔들 만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상록 아주머니는 물 한 모금을 청해 마신 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데 말이죠… 그 조카분 성함이 지훈이래요. 왠지 모르게 할머니 아드님하고 이름이 같아서, 제가 괜히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그 순간, 은주 할머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온했던 오후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지훈이라는 이름. 흔한 이름이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의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지훈이라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상록 아주머니는 은주 할머니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그러게요. 어찌나 우연인지. 그런데 그분이 젊을 때 이 마을을 떠났다가… 이제야 다시 돌아오시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냥 흘려들었는데, 왠지 할머니 생각이 나서요.”

상록 아주머니는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은주 할머니의 오랜 상처를 알았기에, 괜한 기대를 심어줄까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바람이 다시 한번 툇마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멀고 먼 시간의 끝자락에서 날아온 듯한,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소식이었다.

은주 할머니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스무 살, 맑고 순수했던 아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작은 오해와 운명의 장난으로 가족의 품을 떠났던 지훈. 그 후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살아는 있을까.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매일 밤 별에게 묻고 달에게 빌었던 수많은 질문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가 봄바람을 타고 온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은주 할머니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지훈’이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그 이름이 과연 그녀의 아들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수십 년간 굳게 닫아두었던 희망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느낌에,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했다. 만약 그가 맞다면…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그동안 홀로 견뎌냈을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그녀의 마음을 휘저었다.

다음 날 아침, 은주 할머니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뜰에 나가보니,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이 더욱 생기 넘쳐 보였다. 그녀는 한참을 뜰을 거닐었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초조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결심했다. 그저 이렇게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지유야,” 은주 할머니는 댓돌 위에 신발을 놓으며 손녀를 불렀다. “할머니랑 건너 마을에 잠깐 가볼까 싶구나.”

지유는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묘한 긴장감과 희미한 희망을 읽었다. 평소라면 좀처럼 나서지 않던 할머니의 모습에 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손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은주 할머니는 마을 어귀를 나섰다. 봄의 햇살은 눈부셨고, 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동시에 가벼웠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장 큰 기대를 품은 채, 은주 할머니는 그렇게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갔다. 어쩌면 그 길의 끝에는,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의 실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