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도시의 공기가 지훈의 낡은 코트 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1272번째 겨울이었다. 셀 수 없는 밤을 지새우고, 수천 킬로미터를 헤매며, 수많은 거짓된 희망과 실망의 파도를 견뎌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탐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사실 지훈은 그저 한 사람을 찾는 평범한 남자였다. 잃어버린 첫사랑, 서연을.
이번에 그를 이끈 실마리는 한 장의 낡은 영수증이었다. 오래된 동네의 작은 헌책방, ‘시간의 서점’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영수증은 서연의 유품 속에 숨어 있던 찢어진 편지의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내용과 함께 적힌 서점의 이름. 지훈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번만은… 이번만은 아닐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이 그의 메마른 심장을 옥죄었다.
서점의 문 앞. 낡은 목재 문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시간의 서점’. 간판마저도 바래어, 글자들이 흐릿했다. 지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낡은 나무 문을 여는 순간, 맑은 종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먼지와 종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풍기는 잉크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이 그를 감쌌다.
서점 내부는 예상대로 고요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책장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고, 옅은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먼지 알갱이들이 춤추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디선가 낮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훈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카운터는 비어 있었고, 그 흔한 손님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서가와 서가 사이를 헤매며 익숙한 것, 혹은 서연의 손길이 닿았을 법한 흔적을 찾았다.
그는 시집 코너로 향했다. 서연이 가장 좋아했던 장르였다. 낡은 시집들 사이에서 유난히 닳아 보이는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서연이 늘 품고 다니던 책이었다. 지훈의 손이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책을 꺼내 들었다. 책갈피 사이에는 한때는 싱싱했을, 그러나 지금은 바싹 말라버린 작은 들꽃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쓰인 작고 익숙한 글씨체. ‘별을 사랑했던 소녀에게.’ 서연이 자기 자신에게 썼던 문장이었다. 지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그때, 서점 깊숙한 곳에서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책은 마지막 재고입니다. 귀하게 다루어주세요.” 목소리는 과거의 맑고 발랄했던 톤과는 사뭇 달랐다.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듯 더 깊고, 차분했다. 하지만 지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뜨거움과 동시에 차가운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 목소리는… 이 목소리만은….
지훈은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시집을 품에 안은 채, 책장과 책장 사이의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한 발, 또 한 발.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서점 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책장을 돌아섰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훈의 모든 세계가 정지했다.
창가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한 여인이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등 돌린 여인의 뒷모습은 지훈의 기억 속 서연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긴 생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자세는 한층 더 우아하고 성숙해 보였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치 않은 것은, 가는 목덜미의 곡선과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상냥한 몸짓이었다.
지훈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숨을 죽였다.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수천 밤을 헤매며 그리워했던 뒷모습. 꿈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림자. 바로 그녀였다. 마침내, 아이가 깔깔거리며 웃자, 여인이 고개를 돌려 아이에게 미소 지었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살짝 깊어진 눈가의 주름, 세월의 흔적이 옅게 스민 얼굴이었지만, 지훈의 뇌리에 각인된 첫사랑의 얼굴, 서연이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여보, 이제 쉬어요.”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 한 남자가 여인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다가왔다. 남자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여인, 서연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 듯한,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였다.
지훈은 얼어붙었다. 그의 품에 안긴 『별 헤는 밤』 시집이 땅으로 떨어졌다. 쿵,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서연도, 그 남자도, 그리고 아이도 지훈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서로에게만 닿아 있었다. 1272화에 걸친 지훈의 길고 긴 여정은, 비로소 잔인한 결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는 지금,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