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훈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방에 갇혀 지낸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낡은 작업실은 그의 어머니, 강은서가 살아생전 숨 쉬고, 웃고,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건반 위에 쏟아내던 공간이었다. 햇살은 창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고, 공기 중에는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빛줄기 속에서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낡은 그랜드 피아노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과시했다. 검고 육중한 몸체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칠이 벗겨진 부분과 누렇게 변색된 상아 건반들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듯했다.
지훈은 며칠 밤낮으로 어머니의 악보들을 뒤적였다. 흩어진 음표들 사이에서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알려진 ‘새벽의 노래’의 미완성 부분을 찾아 헤맸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그 곡을 완성하기 직전, 홀연히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훈은 어린 시절부터 그 미완의 멜로디 속에 어머니의 마지막 메시지, 혹은 그녀가 사라진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수많은 밤을 허비하며 머리를 싸맸지만, 조각난 음표들은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따라 피아노는 그를 더욱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짐처럼, 혹은 해답을 알고도 말해주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지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머니가 연주할 때마다 느껴졌던 웅장한 진동, 깊고 풍부한 울림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피아노로 다가갔다. 손가락이 낡은 나무 상판 위를 미끄러졌다. 차가운 촉감.
“엄마…”
나직이 불러본 이름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는 더 이상 악보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늘 말했었다. “음악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다. 귀 기울여야 해. 그리고 가끔은… 눈을 감아야 보이지.” 그 말이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어머니가 피아노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던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들을 더듬었다.
“이 피아노는 나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 지훈아, 언젠가 네가 아주 많이 자라면, 이 비밀이 네게 필요할 때가 올 거야.”
그때는 그저 어린 아들을 위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말은 심장을 후벼 파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물리적인 비밀. 그는 피아노의 외형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 정교하게 조각된 옆면, 악보 받침대 아래, 건반 아래.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의 모든 면을 더듬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 먼지 묻은 손끝. 수십 년 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을 법한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그의 심장은 미약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손이 피아노의 음향판과 몸체가 만나는 가장자리,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닿았다. 그곳에 작은 패널이 있었다. 다른 나무와는 미묘하게 다른 결, 그리고 손톱으로 누르자 아주 약간의 틈이 느껴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훈은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조심스럽게 패널을 들어 올렸다.
안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 속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인, 그러나 정교하게 조각된 작은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마치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뛴 듯, 그 작은 상자에서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피아노 상판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나무 향과 함께 미세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상자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누렇게 바랜 악보 한 장. ‘새벽의 노래’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곡이었다. 어머니의 필체로 조심스럽게 쓰인 악보의 제목은 ‘마지막 자장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게 접힌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지훈은 악보를 잠시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어머니의 글씨체는 여전히 우아하고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힘겹게 눌러 쓴 흔적이 역력했다.
“사랑하는 지훈아. 이 편지를 네가 읽을 때쯤이면, 엄마는 네 곁에 없을 거야.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구나. 나는 오랜 시간 병마와 싸워왔단다.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애썼지만, 내 몸은 점점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어. 마지막 순간에 네게 병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너와 피아노를 남기고 떠나는 길을 택했단다.”
지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의 사라짐은 늘 그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물음표였다. 그러나 이제 그 물음표는 잔인한 진실로 바뀌었다. 병. 그토록 강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말 못 할 병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다니.
편지는 계속되었다.
“‘새벽의 노래’는 내가 너를 위해 꿈꿨던 미래의 선율이었어. 네가 스스로의 음악을 찾아갈 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던 곡이었지. 하지만 나의 마지막은 ‘새벽’이 아닌 ‘황혼’에 가까웠단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자장가’를 남긴다. 네가 엄마를 찾지 않기를, 대신 너만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소원과 함께. 아들아, 울지 마렴. 음악 속에서 엄마를 기억하고, 너의 삶을 연주하렴.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지훈은 편지를 품에 끌어안고 흐느꼈다. 그동안 그를 짓눌렀던 거대한 의문과 분노, 그리고 상실감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다. 미완의 ‘새벽의 노래’가 아닌, 이 ‘마지막 자장가’가 진짜 어머니의 작별 인사였다.
눈물이 마르자, 그는 비로소 ‘마지막 자장가’의 악보를 집어 들었다. 흐릿한 음표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고통과 사랑이 뒤섞인 마지막 유산. 그는 악보를 피아노 받침대에 올렸다. 낡은 피아노는 이제 더 이상 침묵하는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 그녀의 영원한 사랑을 담은 그릇이었다.
지훈은 건반 앞에 앉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첫 건반을 눌렀다. 낡은 피아노는 길고 깊은 침묵 끝에, 마침내 그가 기다려왔던 어머니의 노래를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할 준비를 마쳤다. 그 노래는 이별의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선율이 될 터였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진정한 유산, 그 노래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