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회색빛이었다. 가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던 미련한 햇살마저 간밤의 서리에 얼어붙은 듯, 얄팍한 구름 뒤에 숨어버렸다. 서늘한 기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오래된 마룻바닥을 타고 발끝을 간질였다. 나는 낡은 털실 스웨터를 더 끌어당겨 입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란 이렇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스쳐가는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사뿐히,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그림자. 이내 부드러운 털뭉치가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허벅지를 타고 스며들었다. 길고양이 밤이였다. 늘 그랬듯, 조용히 다가와 제 존재를 알리는 그 아이만의 방식이었다. 녀석은 몸을 둥글게 말고는 이내 고롱고롱 낮은 울림을 시작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한 소리였다.
밤이의 체온이 전해질수록 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밤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털 사이로 느껴지는 작은 심장의 박동. 수많은 밤을 함께 했음에도 여전히 녀석의 존재는 내게 기적 같았다. 오늘의 내 고민은 어제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가올 겨울, 그리고 또 한 번 찾아올 삶의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어쩌면 나는 평생을 그렇게, 닥쳐오지 않은 일들에 대한 불안으로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호박색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가 담겨 있었다. 무엇인가를 묻는 듯도 하고, 또 무엇인가를 답하는 듯도 했다. 나는 가만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녀석의 시선은 늘 그랬다. 애써 감추려 했던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과 동시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함이 공존했다.
“너는… 두렵지 않니, 밤이야?”
내가 나지막이 묻자 밤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치 ‘무엇이?’라고 되묻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무엇이 두려워?’라고 반문하는지도 몰랐다. 녀석은 이 집으로 찾아오기 전, 얼마나 많은 겨울을 홀로 견뎠을까. 비바람 치는 날,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녀석은 묵묵히 제 시간을 살아냈을 것이다. 어떤 기대도 없이, 오직 현재에 집중하며.
밤이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내가 잊고 있던, 혹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보았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인다.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일 뿐이다. 밤이에게는 내일의 먹이나 모레의 추위가 오늘을 잠식하는 법이 없었다. 녀석은 지금 이 순간, 내 무릎 위에서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과 고롱거리는 소리로, 모든 것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중얼거렸다. 밤이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내 손길에 얼굴을 비비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어. 그저 오늘을 살면 되는 것을.”
밤이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했다. 거창한 말이나 복잡한 철학이 아니었다. 그저 존재함으로, 온몸으로 삶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녀석의 털에서 스며 나오는 은은한 햇살 냄새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오래된 응어리를 풀어주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다가올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두려움이 지금 이 순간을 잠식하게 두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밤이를 품에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회색빛 하늘이었지만, 어쩐지 그 풍경이 더 이상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이와 함께라면, 어떤 겨울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녀석의 따뜻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준비를 하는 듯, 고요하고도 충만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