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도시의 창백한 얼굴을 씻어내리는 밤이었다. 김민준은 낡은 트렌치코트 깃을 바싹 세우고 어두운 골목 어귀에 몸을 숨겼다. 손에 든 오래된 사진 속 희미한 미소와, 몇 주 전부터 그가 그림자처럼 뒤쫓아온 한 여인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녀의 이름은 윤서아. 그러나 민준의 가슴 속에서는 언제나 ‘서은채’였다.
갤러리 ‘기억의 조각들’이라는 간판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오후 내내 그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봤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는 그림 같았다.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졌고, 검은색 스웨터 위로 섬세한 손길이 오가며 작은 조형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움직임, 작은 습관들, 심지어는 어딘가 모르게 고독해 보이는 어깨선까지, 모든 것이 은채였다.
민준의 손이 주머니 속 낡은 조약돌을 쥐었다. 열여덟 살 여름, 은채와 함께 강가에서 주웠던 매끄러운 돌이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걸 가지고 있어줘.’ 수줍게 건네던 그녀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조약돌은 그의 탐정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유일한 단서이자 희망이었다.
이제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수천, 수만 번의 고뇌와 수백 개의 헛된 단서를 쫓아 헤매던 지난한 시간을 보상받을 때가 왔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심을 굳힌 채 갤러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구두가 축축한 바닥을 밟으며 미세한 소리를 냈다.
유리문이 열리자, 은은한 나무 향과 함께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인 공기가 민준을 맞았다. 벽에는 추상적인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중앙에는 다양한 크기의 조형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쨍그랑거리는 풍경 소리가 공간을 흔들었고, 그 소리에 윤서아, 즉 은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민준에게 닿았다. 찰나의 순간, 그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요동쳤다. 사진 속에서 스무 살의 미소로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었지만, 투명한 눈동자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어서 오세요. 비 오는 날인데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의 기억 속 은채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낮고 깊어졌지만, 그 울림만큼은 익숙했다. 민준은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문을 열었네요.”
“네, 제가 좀 정리할 것이 있어서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녀는 다시 조형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민준은 천천히 그림들을 훑는 척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그녀의 손끝에 머물렀다. 섬세하게 빚어진 작은 새 모양 조형물. 은채는 예전에도 작은 새를 참 좋아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종이학을 접어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새…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드네요.” 민준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하나요?”
“네. 어렸을 때, 아는 사람이 이 새와 비슷한 걸 만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민준은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벤치. 공원. 분명 그녀에게는 의미 있는 단어들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미세한 파문이 일렁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갤러리 문이 다시 열렸다. 축축한 바깥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고, 단정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들어섰다. 짙은 회색 코트를 입은 그는 곧장 윤서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서아 씨.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오늘 저녁은 같이 먹기로 했잖습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서아 씨’. 그 호칭에 민준의 가슴이 다시 한번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남자의 등장에 얼어붙은 듯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방금 전 민준과의 대화에서 피어났던 아련한 감정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차분함 속에 감춰진 깊은 체념과 불안이 자리했다.
“아, 이재훈 씨. 죄송합니다. 잠시 손님 응대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민준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재훈은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의 시선은 탐색적이었고, 경계심이 역력했다. “늦은 시간까지 갤러리에 관심 있는 분이 계셨군요. 제가 대신 마무리해드리고 서아 씨는 먼저 들어가 쉬시죠.”
이재훈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명백히 민준을 내쫓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은채, 아니 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드는 것을 민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에 갇혀 있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준은 이재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단번에 이 남자가 은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녀가 왜 ‘윤서아’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쥐고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스무 해 동안 갈망했던 재회는 이렇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 오랜 시간 헤매고 헤매어 겨우 닿은 그녀의 곁이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군요. 다음번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재훈의 입가에 미세한 비웃음이 걸렸다. 민준은 더 이상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갤러리를 나서기 직전, 그는 은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형물을 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의 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 갇힌 듯한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민준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때렸지만, 그의 심장은 뜨거웠다. 이재훈이라는 예상치 못한 장벽이 나타났지만, 동시에 확신도 얻었다. 은채는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를 덮고 있는 모든 베일을 걷어낼 때였다. 20년의 기다림 끝에, 그의 첫사랑은 단순한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감춰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며, 민준은 젖은 두 눈을 번뜩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