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온기, 묵은 추억의 맛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여명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새벽 다섯 시, 김 할아버지 제빵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밀가루와 이스트가 살아 숨 쉬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창문 밖은 아직 어스름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지만, 빵집 안은 오븐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열기와 구수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막 구워낸 호밀빵의 껍질이 ‘탁, 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소리는, 마치 빵집이 깨어나 세상에 인사를 건네는 소리 같았다. 1302번째 아침이었다.
김 할아버지 제빵사는 능숙한 손길로 식빵을 틀에서 꺼내 식힘망에 올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그에게 빵은 결코 똑같은 빵이 아니었다. 반죽 하나하나에 그날의 날씨, 그의 기분, 그리고 알 수 없는 인연들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마음을 쓰이게 하는 손님이 있었다. 바로 지수였다.
지수는 3년 전부터 거의 매일 빵집을 찾았다. 늘 비슷한 시간, 늘 똑같은 표정으로, 늘 우유식빵 하나를 조용히 사 갔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빵을 고르는 뒷모습에서 묵은 슬픔 같은 것을 읽곤 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그 그늘이 짙어 보였다.
“할아버지, 우유식빵 하나 주세요.”
지수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따뜻한 식빵을 봉투에 담으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 늘 단정하던 머리칼도 오늘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지수 양, 오늘은 영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할아버지의 다정한 물음에 지수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아니요, 할아버지. 그냥… 잠을 좀 설쳤어요.”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어쩐지 오늘따라 빵집의 훈훈한 온기가 스며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잊혀진 레시피, 어렴풋한 기억
지수가 처음 이 빵집을 찾은 건, 엄마와의 갈등이 폭발한 직후였다. 엄마는 늘 자신의 꿈을 ‘쓸데없는 짓’이라며 폄하했고, 지수는 그런 엄마에게 지쳐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엄마는 시장 어귀의 작은 떡집을 운영하며 평생 고생했지만, 지수는 엄마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특히 엄마가 만들던 ‘개떡’이나 ‘증편’ 같은 투박한 음식들을 보며, 세련된 제과제빵의 세계를 꿈꾸는 자신과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후로 3년간 연락 한 번 없었다.
우유식빵을 씹을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어릴 적, 가게에서 팔다 남은 쌀로 가끔 큼직한 ‘쌀식빵’을 구워주곤 했다. 이스트 냄새가 아니라 쌀 특유의 은은하고 구수한 향이 나는 투박한 식빵. 어린 지수는 그 빵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와 틀어지고 난 후, 그 쌀식빵의 맛은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여,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시절의 온기를 찾아 이 빵집의 우유식빵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звонкий 목소리가 빵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할아부지! 미나 왔어요!”
옆집 유치원생 미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들어왔다. 할아버지 빵집의 단골이자, 빵집의 활력소 같은 아이였다. 미나는 할아버지에게 안겨 재롱을 부리더니, 카운터 옆에 놓인 투박한 빵 하나를 가리켰다. 동글납작하고 겉은 노릇하게 구워졌지만, 우유식빵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는 않는, 어쩐지 정겹고 오래된 느낌의 빵이었다.
“할아부지, 이거는 뭐예요? 처음 보는 빵인데!”
할아버지는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이건 할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옛날 생각나서 만들어 본 쌀 보리빵이야. 밀가루 대신 쌀가루랑 보릿가루를 넣고, 막걸리 이스트로 발효시킨 거지. 요즘 애들은 잘 안 좋아하는데, 할머니들이 아주 좋아하시던 빵이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쌀. 막걸리 이스트. 투박한 모양. 잊고 지냈던 엄마의 쌀식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는 늘 막걸리 이스트를 직접 만들어 썼고, 그 쌀식빵은 밀가루 빵과는 다른,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구수한 풍미가 있었다.
빵 한 조각, 마음의 다리
“지수 양, 이거 한 조각 맛볼래?”
할아버지는 미나에게 빵을 잘라주다 말고, 문득 지수에게도 권했다. “오늘 아침에 문득, 예전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레시피가 생각나서 한번 구워봤어. 왠지 지수 양이 좋아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의 권유에 지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이끌려, 그녀는 빵 한 조각을 받아들었다. 따끈한 빵 조각에서 피어나는 희미한 막걸리 이스트 향, 그리고 구수한 쌀가루의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잊고 있던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씹을수록 쫀득한 식감,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달짝지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구수함.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 맛이었다. 바로 이 맛이었다. 엄마가 어린 자신에게 구워주던, 그 어떤 고급 빵과도 바꿀 수 없었던, 엄마의 사랑이 담긴 쌀식빵의 맛. 잊고 지냈던 그 맛이 혀끝을 통해 심장까지 온기를 전하는 듯했다.
그 순간, 지수는 깨달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모든 말과 행동들이, 비록 서툴고 때로는 상처가 되었을지언정, 그 바탕에는 언제나 깊은 사랑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투박한 떡과 쌀식빵을 만들던 엄마의 손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은 엄마의 사랑을 ‘제과점 빵’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수는 봉투에 든 우유식빵과 손에 든 쌀 보리빵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리고 결연하게 빵집을 나섰다. 평소와는 다른 걸음걸이였다. 이제 더 이상 묵은 슬픔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듯,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발걸음이었다.
할아버지 제빵사는 빵집 문을 나서는 지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빵집 창문 밖으로 어느새 해가 떠오르며 따스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함께,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는 오늘도 소박하지만 따뜻한 기적이 내려앉았다. 지수의 손에 들린 쌀 보리빵 한 조각은, 수년 간 끊어졌던 모녀의 마음을 잇는 따뜻한 다리가 될 것이었다. 김 할아버지 제빵사는 조용히 다음 반죽을 준비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