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289화

새벽안개가 걷히고 첫 햇살이 동쪽 산등성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난겨울 내내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에는 연둣빛 새잎들이 물기 어린 생기로 돋아나고 있었다. 대문 활짝 열린 윤서의 작은 한옥 마당에는 살구꽃이 만개하여 연분홍 꽃잎을 아침 바람에 설렘처럼 흩뿌렸다. 그 꽃잎들은 마치 오래도록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손길 같았다.

윤서는 툇마루에 앉아 따뜻한 쑥차를 들고 마당을 응시했다. 봄바람은 그녀의 뺨을 스치며 겨울 동안 굳어졌던 마음의 껍질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도 여전히 그녀의 가슴 한켠에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아리게 남아 있었다. 10년 전, 그 어느 봄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생 수아. 그 이름은 여전히 윤서에게는 한 떨기 시든 꽃잎처럼, 혹은 메마른 눈물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다.

“윤서야, 또 넋 놓고 있니? 차 식겠다.”

부엌에서 나오던 할머니가 잔잔한 목소리로 윤서를 불렀다. 주름진 손에는 갓 쪄낸 쑥개떡이 소반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윤서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그냥… 바람이 너무 좋아서요.”

할머니는 윤서 옆에 앉아 따뜻한 쑥개떡을 건넸다.

“좋은 바람이구나. 바람은 멀리 있는 소식도 전해주고, 또 멀리 있는 마음도 데려오지.”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윤서의 아픈 곳을 건드리면서도 동시에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윤서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어둠 속 한 줄기 빛

그날 오후, 윤서는 읍내 장터에 나섰다. 봄나물이며 햇곡식을 파는 상인들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던 윤서의 발걸음이 문득 한 노점 앞에서 멈춰 섰다. 낡고 빛바랜 그림들을 파는 할아버지의 좌판이었다. 윤서의 시선이 한 그림에 못 박혔다. 낡은 종이 위에 수채화로 그려진 작은 꽃 한 송이. 다른 그림들과 달리, 그 꽃은 유독 윤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들꽃이었지만, 그림 속 그 꽃은 어딘가 모르게 수아가 즐겨 그리던 그림체의 특징을 닮아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윤서는 그림을 집어 들었다. 그림 뒷면에는 잉크가 번진 작은 글씨로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길을 잃어도, 이 꽃을 따라 오세요.’

그것은 수아와 윤서가 어릴 적 서로에게 건네던 암호 같은 말이었다. 윤서는 믿을 수 없어 손을 떨었다. 10년 동안 수없이 많은 희망과 절망의 파편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런 명확한 단서는 처음이었다. 그림을 파는 할아버지에게 급히 물었다.

“할아버지, 이 그림… 어디서 나신 건가요? 누가 그린 건가요?”

할아버지는 희미한 눈으로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글쎄, 몇 년 전에 저기… 북쪽 산골 마을에서 내려온 한 젊은 여인이 팔고 간 그림들 중 하나라네. 그림도 몇 점 안 되고,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림을 팔아야만 한다며… 이름은 안 가르쳐 주고.”

북쪽 산골 마을. 그곳은 윤서가 수아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수소문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고 포기했던 곳이었다. 윤서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림은 그녀의 손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되살아나는 기억, 흔들리는 희망

집으로 돌아온 윤서는 그림을 할머니께 보여드렸다. 할머니는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이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수아 솜씨가 분명하구나… 이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꼭 수아 같아.”

할머니의 확신에 윤서의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슬픔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다. 혹시 또 다시 희망고문일까 봐, 혹시 이마저도 덧없는 꿈일까 봐.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 씨, 계세요?”

지훈이었다. 언제나 윤서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든든한 존재. 그는 윤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에요, 윤서 씨? 얼굴빛이….”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훈에게 그림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훈은 조용히 윤서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내 진지하게 굳어졌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서예요. 북쪽 산골 마을이라면, 제가 아는 분이 그쪽에 작은 약초 가게를 하고 계세요. 한 번 찾아가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훈의 말에 윤서는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린 듯한 기분이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버거웠던 이 거대한 희망과 불안 속에서, 지훈은 언제나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봄바람이 전하는 약속

그날 밤, 윤서는 잠 못 이루고 마당으로 나섰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살구꽃 향기가 밤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졌다. 그녀는 그림을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 수아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언제나 밝고 명랑했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수아.

‘수아야, 네가 정말 살아있는 거니? 네가 이 꽃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거는 거니?’

따뜻한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수아의 손길처럼. 윤서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희미한 실낱같은 희망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이제 두려워하지 않고 잡고 나아가야 했다. 10년의 기다림, 10년의 아픔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동쪽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윤서는 지훈과 함께 북쪽 산골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수아가 그린 작은 꽃 그림이, 그리고 가슴속에는 새로운 희망과 함께 굳건한 결심이 들려 있었다. 봄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불어와, 이제는 단순한 소식이 아닌, 용기와 약속을 전하는 듯했다. 이 길의 끝에서, 과연 그녀는 잃어버린 동생 수아를 만날 수 있을까. 봄바람은 침묵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뜨겁게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