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리는 시계 – 제412화

지우의 손가락 끝이 얼음장 같았다. 낡은 회중시계의 차가운 금속감이 손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했다. 무수한 밤을 새며 만져온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 무게가 지독하게 느껴졌다. 시계의 톱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굉음이었을지도 모른다.

412번째였다. 유진이 그 길을 떠나려 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시도가. 햇살이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와 먼지 가득한 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유진은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언니, 나 다녀올게!” 그 순수한 미소가 지우의 심장을 칼로 베는 듯 아려왔다.

흐려지는 기억의 파편들

처음에는 명확했다. 유진이 그 여름날, 어떤 사람을 만나러 떠나고, 그 만남이 결국 유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 지우는 그 날을 되돌렸다. 한 번, 두 번, 수십 번. 유진이 다른 길을 택하도록,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행복만을 좇도록. 하지만 시간은 지우의 의지대로만 흐르지 않았다. 매번 다른 변수가 생겨났다.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또 다른 불행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유진이 꿈꾸던 예술가의 길을 포기시키자, 그녀는 빛을 잃은 눈으로 지우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자, 유진은 이유 모를 상실감에 시달렸다. 죽음을 피하게 하자, 그 대신 지독한 외로움이 유진을 잠식했다.

기억이 점차 흐려졌다. 어떤 비극이 진짜였고, 어떤 비극이 지우가 만들어낸 것이었는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412번의 반복 속에서 유진의 얼굴조차 때때로 낯설게 느껴졌다. 이토록 많은 유진을 만나고 떠나보냈는데, 대체 어떤 유진이 ‘진짜’ 유진이었을까? 지우는 그녀가 지키려 했던 유진의 모습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저항

회중시계는 지우의 손 안에서 차갑게 빛났다. 그 안의 태엽은 예전처럼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미세한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마치 시간이, 아니 우주가 지우의 간섭에 저항하는 듯했다. 지난번에는 시계를 되돌리자마자 강렬한 두통과 함께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의 친구들은 지우가 기억하는 과거와는 다른 말을 했고, 거리 풍경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은 결국 유진을 그 ‘운명의 길’로 다시 밀어 넣으려는 듯 보였다.

“언니, 왜 그렇게 넋 놓고 서 있어? 나 버스 놓치겠네!”

유진의 목소리가 지우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유진은 웃고 있었다. 가방에는 그녀의 그림 도구들이 가득했고, 눈빛에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이 반짝였다. 이 모든 것을 지우는 411번이나 보았다. 이 길을 떠나면 유진은 낯선 도시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예술에 대한 좌절감에 시달리며, 결국 지우가 기억하는 그 비극의 서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지우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자, 금속 몸체가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다시 되돌려야 할까?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내야 할까? 아니면, 이번에는 그저 유진을 그 길로 보내야 할까?

선택의 기로

유진은 지우의 품에 안겨 가볍게 포옹했다. 유진의 따뜻한 체온이 지우의 차가운 몸에 전해졌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그 순간, 지우의 머릿속에 수많은 유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우의 ‘구원’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유진, 빛을 잃고 침묵하던 유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희망으로 빛나는 유진. 어느 유진이 진짜 행복했을까? 아니, 지우는 과연 유진에게 행복을 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죄책감과 절망을 회피하기 위해 유진의 시간을 억지로 멈춰 세웠던 것일까?

창밖으로 시내버스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이 급히 몸을 뗐다. “버스 왔다! 언니, 안녕!”

유진이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지금이다. 지금 시계를 돌리면, 유진은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412번째의 기회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태엽을 감는 익숙한 동작을 하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시계의 유리면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서, 어렴풋이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피곤하고, 하지만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 그 얼굴은 지우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언니, 이젠 괜찮아. 괜찮아…’

지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굳어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차가운 회중시계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더 이상 째깍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리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더 이상 유진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버스가 출발하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이 떠났다.

지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유진을 보냈다. 그녀의 심장은 텅 빈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가 마침내 멈춘 순간, 지우의 시간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절망 때문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희망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유진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지우는 중얼거렸다. “이번엔, 이번에야말로…”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비극이 없을 것이라는 희망? 아니면, 비극이 찾아와도 이번엔 자신이 유진 곁에서 함께 견뎌낼 것이라는 다짐?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계가 멈춘 지금, 지우는 더 이상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지금부터 펼쳐질 유진의 미래와, 그 미래를 기다리는 자신의 시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