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299화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299화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

서연은 오랜 습관처럼 낡은 나무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그 온기 속에는 아직 겨울의 잔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묵은 슬픔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였다. 앞마당에는 갓 피어난 진달래가 연분홍빛 수줍은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댓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 모든 풍경이 그림 같았지만, 서연의 시선은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1298번의 계절이 바뀌고, 수많은 이야기가 그녀의 삶을 스쳤지만, 여전히 그녀의 가슴 한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서연아, 감기에 걸리겠다. 안으로 들어오렴.”

구순을 바라보는 할머니 화자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에 드리워진 인자한 미소는 서연에게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도 따뜻했다. 서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서는 달큰한 생강차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서연의 손을 잡고 따스하게 감쌌다. 할머니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투박했지만 온기가 가득했다.

할머니의 지혜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겨 있느냐. 봄바람이 불면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야 하는 법인데, 너는 아직도 겨울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것 같구나.”

화자 여사는 서연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찻잔 속 찻잎이 나른하게 흔들렸다. 서연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목을 타고 흐르는 따뜻함이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그냥요… 할머니. 문득, 지나온 시간들이 꿈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봄바람에 실려 불현듯 찾아오는 것 같아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지난밤 꿈속에서 지훈을 만났다. 젊은 날의 지훈은 여전히 싱그럽고 눈부셨다. 함께 거닐던 벚꽃길, 나란히 앉아 속삭이던 강가의 돌담. 그 모든 순간이 선명했다.

화자 여사는 서연의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봄바람은 그저 씨앗을 나르는 게 아니란다. 때로는 잊힌 기억을, 때로는 새로운 인연을, 때로는 아주 오래된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는 게지. 어떤 바람이 불어오든, 그 바람 속에서 네가 피워낼 꽃을 생각해야지.”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묘한 힘이 있었다. 서연은 할머니의 말을 곱씹으며 창밖의 진달래를 바라보았다. 저 꽃도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고 피어났으리라. 과연 자신은 어떤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소식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오래된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할머니 댁을 찾는 이가 흔치 않은 터라, 서연은 의아한 얼굴로 현관으로 향했다.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그는 서연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연 씨 되십니까? 제가 중요한 소식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남자의 손에는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낀 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봉투를 받아든 서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투를 뜯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필체의 편지 한 통과 작은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편지는 지훈의 것이었다. 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어 번 눈을 비볐다. 지훈은 오래전, 그녀의 곁을 홀연히 떠났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와 헤어진 후, 서연은 삶의 가장 깊은 상실감을 겪어야 했다. 편지 내용은 마치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탄식처럼 서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서연아, 이 편지가 네게 닿을 때쯤 나는 아마…

첫 문장부터 불길한 예감이 서연을 덮쳤다. 지훈은 자신이 위독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내용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사진 속 아이. 해맑게 웃고 있는 여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 이 아이의 이름은 은우다. 나와 네가 함께 꿈꿨던, 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그 이름. 미안하다, 서연아. 너무 늦게 말해서. 나는 네게 이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다. 너라면, 은우를 세상의 어떤 꽃보다 소중히 키워줄 거라 믿는다.

혼돈과 숙명

사진 속 아이의 눈동자는 지훈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서연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지훈이 떠난 후, 서연은 그와의 모든 인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봄바람은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숙명을 전해 온 것이었다.

할머니 화자 여사가 놀란 서연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서연아. 얼굴이 창백하구나.”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에게 편지와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더니, 이내 아이의 사진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슬픔과 연민, 그리고 알 수 없는 체념이 할머니의 눈빛에 스쳤다.

“아이고… 세상에… 이렇게 깊은 사연이 있었구나.”

할머니의 나직한 탄식이 들렸지만, 서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은우’라는 이름과 아이의 해맑은 미소로 가득 찼다. 지훈이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선물. 아니, 마지막 짐.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오랜 시간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이 강제로 열리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사랑했던 이의 그림자가 그녀의 삶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연에게 그 바람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거대한 질문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아이는, 마치 운명의 거울처럼 서연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연은 과연 이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삶은 이 아이로 인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봄바람은 그저 소식만을 전해줄 뿐, 그 대답은 오롯이 서연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