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언제나 지우에게 비밀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존재였다. 도시의 불빛이 아무리 밝아도, 그녀의 옥상에서는 언제나 몇몇의 별들이 끈질기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오늘 밤도 그랬다. 검푸른 벨벳 위에 뿌려진 은가루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들이 숨 쉬고 있었다.
지우는 낡은 라디오를 무릎에 올려두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볼륨을 조절하자 익숙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그녀의 20대 절반을 함께 해온 프로그램이었다. “오늘도 밤하늘 아래,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모든 분께 이 노래를 바칩니다.” DJ의 나직한 음성에 이어 잔잔한 기타 선율이 공간을 채웠다.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그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을 좋아했다.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많은 꿈들이 그 별똥별과 함께 하늘로 흩어졌을 것이다. 화가가 되고 싶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세상 끝까지 여행하는 모험가가 되고 싶었다. 지금의 지우는? 평범한 사무실의 평범한 직원.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고, 점심에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퇴근 버스에 몸을 싣는, 지극히 보통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어린 날의 약속
“지우야, 저 별 보여? 저게 북극성이래. 항상 그 자리에서 길을 알려준대.”
어릴 적, 시골 외갓집 마당에서 민준이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펼쳐져 있었다. 열 살의 지우와 민준은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밤늦도록 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우리는 커서 뭐가 될까?” 민준이 물었다.
“나는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 지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민준이는?”
“음… 나는 하늘을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별에 제일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
둘은 까르르 웃었다. 순수하고 빛나는 꿈들이었다. 그때의 민준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나중에 어른이 돼서 힘들어지면, 꼭 이 별들을 보러 오자.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알았지?”
“응! 약속!” 지우는 새끼손가락을 걸며 굳게 맹세했다. 하지만 민준은 중학교 때 가족과 함께 멀리 이사를 갔고, 연락은 점점 뜸해지다 완전히 끊겼다. 그 약속은, 그 밤하늘과 함께 지우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밤하늘이 건네는 위로
“다음 곡은 잭슨 5의 ‘I’ll Be There’입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죠. 지금 이 시간, 당신의 곁을 지키는 별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줄 사람을 떠올리며 들어보시죠.”
DJ의 멘트에 이어 경쾌하지만 감성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지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민준과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 순수했던 꿈들, 빛나던 눈동자. 지금 그녀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너무 늦은 걸까.
눈을 떴을 때, 옥상 난간 너머의 밤하늘은 여전히 침묵하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작은 별들이, 이상하게도 오늘 밤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별들은 수억 년 전의 빛을 지금 여기에 보내고 있는 것이겠지. 과거의 빛이 현재에 도달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녀의 잃어버린 꿈도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디오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이자, 잭슨 5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문득, 그녀의 손이 바닥에 놓여있던 낡은 스케치북에 닿았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지만, 표지를 넘기자 어린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서툰 선으로 그려진 별들, 구름, 그리고 상상 속의 집.
그때, 저 멀리서 하나의 별이 꼬리를 길게 늘이며 떨어졌다.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었지만, 지우의 눈에는 선명했다. 마치 민준이 말했던 ‘하늘을 나는 사람’처럼, 별똥별은 잠시 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지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의 약속이, 이 밤하늘 아래에서 다시금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비록 거창한 변화는 아닐지라도,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그녀의 잊힌 꿈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다시는 놓지 않을 듯 단단히 끌어안았다. 오늘 밤, 별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를 주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빛 아래, 지우의 밤도 깊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