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302화

가을의 끝자락, 창밖으로는 비쩍 마른 나뭇가지들이 스산한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지영의 낡은 서재 안은 한낮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낀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지영과, 환하게 웃고 있는 수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시절의 푸른 약속은 이제 아득한 메아리가 되어 지영의 가슴을 저몄다.

“또 그 생각에 잠겼군요, 할머니.”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영은 늘 그래왔듯, 자신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고양이 늘의 눈빛 속에서 그 말을 읽었다. 늘은 회색빛 털에 세월의 흔적 같은 희끗희끗한 무늬가 박혀 있었다. 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녀석은 이미 늙은 고양이였고, 그로부터 또다시 몇십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변치 않는 지혜로운 눈빛으로 지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영은 늘의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목을 울리며 깊은 만족감을 표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낡은 서재의 고요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래, 늘아. 이맘때쯤이면 꼭 떠오른단다. 그 약속이.”

지영의 시선은 다시 사진 속 수현에게로 향했다. 수현은 지영의 영원한 벗이자, 한때는 삶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젊은 날, 함께 아름다운 언덕에 작은 집을 짓고 여생을 함께 보내리라 약속했었다. 모든 것이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고, 그 약속은 결국 지영 혼자만의 몫이 되어버렸다. 수현은 불현듯 찾아온 병마와 함께 지영의 곁을 떠났고, 지영은 그 약속의 무게에 짓눌린 채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내가 그걸 지키지 못했어. 지켜낼 수 없었어. 너무 어렸고, 너무 두려웠지. 그리고 이제는…… 너무 늦었어.”

지영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늘은 고개를 들어 지영의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크고 깊은 눈동자에는 지영의 모든 슬픔과 후회가 고스란히 비치는 듯했다. 늘은 앞발을 들어 지영의 주름진 손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 움직임은 지영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응어리를 조용히 흔들었다.

오랜 침묵 속의 대화

“너는 괜찮다고 말하는 거니?” 지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이렇게 늙어가는 것을 괜찮다고?”

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영의 무릎 위에 몸을 더욱 바싹 붙였다. 따뜻한 체온이 퍼져나갔다. 늘의 작은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는 단순한 온기를 넘어, 지영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늘은 결코 사람의 말로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있어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지영에게는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도 더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그 언덕에 가지 못했어. 작은 집도 짓지 못했고. 수현이는… 나를 용서할까?”

늘은 갑자기 몸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해 질 녘이 가까워지며 햇살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영은 늘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텅 빈 마당의 한쪽 구석, 잡초가 무성한 곳에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가을의 혹독함을 이겨내고 피어난, 가녀리지만 강인한 생명들이었다.

늘은 다시 지영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그 눈빛에 어떤 희망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지영은 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새로운 약속이, 혹은 과거의 약속을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

수현과의 약속은 비록 육신으로는 함께 이룰 수 없었지만, 그 약속에 담겨 있던 사랑과 염원만은 여전히 지영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지금이라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현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그가 원했을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

새로운 시작의 서곡

늘은 지영의 손을 다시 한번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혀의 감촉이 지영의 정신을 현실로 이끌었다. 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짓눌러왔던 후회의 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늘아.” 지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늘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그르렁거렸다. 고양이는 지영의 무릎에서 내려와 서재 한쪽의 낡은 방석 위로 향했다. 그곳에서 녀석은 웅크리고 앉아, 창밖으로 길게 드리워진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영은 그런 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쩌면 수현이 바라던 작은 집은, 거창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지영의 마음속에 꾸려진 평온하고 따뜻한 안식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늘은 그 안식처의 가장 오래된 주민이었다. 늘이 지영에게 가르쳐 준 것은 단지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용서였고, 치유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존재 자체의 숭고함이었다.

창밖의 노을은 점점 더 깊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지영은 사진 속 수현의 미소를 다시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그 미소 속에서 죄책감 대신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미처 깨닫지 못했던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당으로 나가 가을의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햇살이 스며드는 곳에 뿌려두었던 꽃씨들이 이듬해 봄에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상상해 보았다. 수현과의 약속은 이제 과거의 짐이 아닌, 현재를 살아갈 새로운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늘과 함께 만들어갈 또 다른 수천 번의 대화 속에서, 지영은 분명 그 해답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