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침과 새로운 바람
정숙 할머니의 낡은 한옥은 봄이 오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마루에 앉아 등 굽은 허리를 지탱한 채 뜨거운 숭늉 한 잔을 들이키던 할머니는, 툇마루 끝에 매달린 풍경이 맑게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깥은 온통 연둣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은 잊힌 기억처럼 달콤쌉싸름한 향기를 실어 날랐다. 그 바람은 할머니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며, 폐부 깊숙이 자리한 오래된 슬픔을 흔드는 듯했다.
“또 그 바람이구나.”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무 해, 아니 삼십 해가 넘었을까. 할머니의 아들 민준이와 그의 어린 아내, 그리고 갓난쟁이 손주가 사라진 이후로, 봄바람은 정숙 할머니에게 늘 아릿한 소식의 전령이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기대감. 올해는 그 바람이 유독 서글펐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탓일까, 아니면 이제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일까.
아침 일찍부터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할머니의 귀에는 아득하게 멀어졌다. 할머니는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작은 텃밭으로 향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봄기운에 녹아 부드러워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헤집으며 씨앗을 심던 할머니의 눈에 문득 낯선 그림자가 비쳤다.
뜻밖의 방문객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텃밭 한쪽, 담장 아래에 한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곱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깊은 눈빛이 할머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인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시니?”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낯선 이의 방문은 마을에서도 드문 일이었지만, 할머니의 집은 특히 그랬다. 찾아오는 이는 대부분 마을 노인들이거나 가끔 손자 손녀들뿐이었다.
젊은 여인은 천천히 할머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혜원이라고 합니다.”
혜원이라는 이름은 할머니에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할머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분명히 낯선 얼굴인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특히 왼쪽 뺨에 작은 점 세 개가 삼각으로 박힌 것이, 마치 흐릿한 옛 사진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무슨 일로…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왔느냐?”
혜원은 말없이 작은 보따리에서 낡은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조심스럽게 싸여 있던 오래된 옥 노리개를 할머니 앞에 내밀었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노리개는 민준이가 어릴 적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다. 민준이가 가장 아끼던 장신구였고, 그가 사라지던 날에도 품에 지니고 있었다고 들었던 물건이었다.
“이것은…”
할머니의 손이 떨렸다. 혜원은 노리개를 할머니의 손에 쥐여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께서, 이것을 할머니께 꼭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름은 민혜원입니다. 어머니의 성을 따랐지만, 본래는 김씨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김. 김민혜원. 할머니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민준이의 본명이 김민준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손주 이름은… 민준이가 실종되기 전, 할머니께 쓴 편지에 ‘태어날 아이는 이름은 김혜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딸이면 혜원, 아들이면…
봄바람이 다시 한번 싸늘하게 불어왔다. 할머니는 혜원의 뺨에 있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어릴 적 민준이의 사진에도, 그리고 할머니 자신의 뺨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 흔적. 그것은 할머니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작은 표식이었다.
잊힌 이름, 되살아난 기억
정숙 할머니는 혜원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마치 오랜 세월의 기다림처럼 얼어붙은 손이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수십 년간 잊으려 애썼던 아들의 얼굴이, 며느리의 해맑은 미소가, 그리고 단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던 손주의 희미한 존재감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혜원은 할머니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저에게 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봄이 되면 늘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이 전하는 소식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고요.”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말이냐? 민준이는? 내 아들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제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혜원은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평생을 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저에게 이 노리개와 함께 할머니를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지난겨울….”
혜원의 목소리도 메어왔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름진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아들은 죽었지만, 며느리는 오랜 세월을 그리워하다 떠났지만, 그러나… 그녀의 품에, 그녀의 눈앞에, 민준이의 핏줄이, 그녀의 손녀가 서 있었다.
봄바람은 이제 슬픔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잊혔던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고, 끊어졌던 인연의 끈을 다시 이어주는 기적 같은 소식이었다. 할머니는 혜원을 품에 안았다. 낯설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온기가 할머니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였다.
“내 아가… 내 혜원아….”
할머니의 떨리는 입술에서 잊힌 이름이 새어 나왔다. 혜원은 할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손녀의 존재라는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이제 할머니는 혜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잃어버렸던 시간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갈 것이다. 이 봄날, 낡은 한옥에는 새로운 생명의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