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307화

따스한 봄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오래된 한옥의 마루에 살랑거렸다. 처마 밑 풍경은 맑은 소리를 냈고, 담장 너머 개나리는 이제 막 그 화사한 기운을 다해가는 참이었다. 윤서는 툇마루에 앉아 멀리 나지막한 야산의 초록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년을 살아온 이 집, 수십 번의 봄을 맞았건만 올해의 봄바람은 유난히 간지럽고, 동시에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듯했다.

차 한 잔을 들었지만, 김이 채 식기도 전에 윤서의 시선은 허공을 헤매었다. 잊었다고,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지훈이 있었다. 푸른 봄날의 맹세, 풋풋했던 첫사랑,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의 아픔까지.

그가 떠난 지 벌써 몇 해인가.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이제는 그의 얼굴도 가물가물해질 법도 한데, 봄바람이 실어다 주는 희미한 꽃향기 속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훈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어떤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없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윤서는 그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허망하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오래된 집으로 돌아와 잊는 것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이모,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사촌 언니의 딸, 수아가 다락방에서 먼지를 털며 내려오다 윤서를 발견하고 물었다. 수아는 윤서의 유일한 혈육이자, 그녀의 고독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존재였다. 대학생이 된 수아는 방학을 맞아 잠시 이모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윤서의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슬픔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바람 쐴 겸 나와 앉아 있었어.”

수아는 윤서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다락방 저 안쪽에 박혀 있던 건데, 이모 건가요? 꽤 오래된 것 같던데… 안에 뭔가 들어있는 것 같아요.”

윤서의 시선이 상자에 닿았다. 빛바랜 나무 상자. 언뜻 잊고 지냈던 물건이었다. 예전부터 이 집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져왔던 것인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 가슴 속에서 낯선 불안감이 솟구쳤다.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상자 안에는 낡은 사진 몇 장과,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듯한 얇은 일기장, 그리고… 작은 손바닥만 한 천으로 싼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윤서는 사진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오래전, 흑백 사진 속의 젊은 윤서와 지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빛바랜 사진이었지만, 그들의 미소는 여전히 생생했다.

“이모 젊었을 때 사진인가 봐요. 옆에 있는 분은 누구세요? 남자친구?” 수아의 해맑은 목소리가 윤서의 가슴에 둔탁한 파동을 일으켰다.

“응…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 윤서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천으로 싸인 덩어리를 풀어 보았다. 닳고 닳은 가죽 지갑. 그 지갑 안에는, 접힌 종이 한 장과 함께 빛바랜 주민등록증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주민등록증의 주인이 바로… 지훈이었다.

“이건…” 윤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갑 속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영수증 같기도 하고, 아니면 손으로 직접 쓴 메모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펼쳐든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오래전 지훈이 자신에게 건넸던 자그마한 쪽지였다. 그가 떠나기 며칠 전, 둘만의 비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 쪽지.

하지만, 쪽지 뒷면에 흐릿하게 쓰인 작은 글씨 하나가 윤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잉크가 번져 희미했지만, 분명한 글자였다. ‘…연락처: 010-XXXX-XXXX…’ 그리고 그 밑에는, 아주 최근에 쓰인 듯한 글씨체로 덧붙여진 짧은 메모가 있었다.
“그날, 너를 기다렸어. 미안하다는 말, 이제라도 전하고 싶었어.”

그것은 지훈의 글씨체였다. 윤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쪽지를 쥔 손을 가슴에 가져갔다. 잊으려 했던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봄바람은 여전히 윤서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그 바람은 이제 과거의 비밀과 미래의 알 수 없는 떨림을 동시에 전해주는 듯했다.

수아는 윤서의 얼굴에서 급변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읽었다. 경외감과 놀라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희미한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모, 괜찮으세요?”

윤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손에 든 쪽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010으로 시작하는 열한 자리의 번호. 그 번호는 그녀의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지훈을 향한 모든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간절한 염원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주문이었다. 사라졌던 그가… 다시 그녀의 삶에 발자국을 남기려 하는 것일까. 그녀의 손은 망설임과 떨림 속에서 휴대폰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20년 만에, 봄바람이 실어다 준 이 소식은,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