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이미 온통 흰색이었다. 첫눈치고는 꽤나 맹렬하게 쏟아져 내린 눈발은 금세 세상의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제 안으로 감추고, 묵묵히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창밖을 응시하던 나의 시선은 눈송이 하나하나가 춤추듯 떨어지는 모습에 붙들려 한참을 허공에 머물렀다. 볼품없이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은 순식간에 눈꽃을 피워내며 환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 옆에는 사연(思緣)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연이는 나의 시선이 닿는 곳을 말없이 따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털은 고요한 창밖 풍경만큼이나 차분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꼬리는 리듬 없는 박자로 살랑거렸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의 나직한 골골송은 이 고요한 밤의 유일한 배경 음악이자, 나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위로였다.
오래된 그림자
“정말 많이 오네, 사연아.”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의 말에 사연이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깊은 밤하늘처럼 검고, 그 안에는 묵묵한 이해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사연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눈이 주는 설렘은 여전했지만, 그 설렘 뒤편에는 언제나처럼 오래된 그림자가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이런 눈이 오는 날이면, 유독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어릴 적, 눈사람을 만들던 해맑은 웃음. 꽁꽁 언 손을 녹여주던 따스한 온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련한 기억의 파편들. 가슴 한켠에 박힌 작은 유리 조각처럼, 건드릴 때마다 시큰거리는 통증을 주는 기억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각은 더욱 깊숙이 박혀버린 것 같았다.
“보고 싶다, 그치? 때로는 너무 그리워서 아플 때가 있어. 그 모든 게 다 지난 일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나는 사연이에게 마치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듯 나지막이 말했다. 사연이는 나의 손길에 몸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나의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작은 생명체가 가진 온전한 신뢰가 나를 감쌌다. 사연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이해하는 듯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침묵의 대화
사연이는 나의 손등에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지나간 것을 보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봐’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늘 그렇게 침묵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어쩌면 내가 길들인 것은 사연이가 아니라, 사연이가 나를 길들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사연이의 조용한 움직임을 따라 눈 쌓인 세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창밖은 여전히 눈으로 가득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그림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눈은 모든 것을 덮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연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앞발을 짚었다. 그리고는 유리창 너머의 눈송이를 마치 잡으려는 듯, 앞발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하여 나의 입가에는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래, 이렇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사연이는 나에게 늘 그것을 알려주었다. 지나간 슬픔에 갇히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말라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함께 느끼는 따뜻함과 고요함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라고 말이다. 그의 존재는 나에게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정감이자, 변함없는 위로였다.
새로운 시작의 서곡
나는 사연이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몸이 나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의 심장 박동이 나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지만 힘찬 생명의 박동. 나는 그의 털에 얼굴을 묻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옅은 먼지 냄새와 고양이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눈이 나에게 지나간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백의 서곡처럼 느껴졌다. 사연이와 함께라면, 어떤 겨울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따뜻한 눈빛, 그의 부드러운 털, 그의 조용한 골골송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삶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나는 사연이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마워, 사연아. 항상 내 곁에 있어줘서.”
사연이는 나의 말에 대답하듯 작게 하품을 하고는, 나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따뜻한 온기에 기대어, 창밖의 하얀 세상이 밤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덮어쓰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길고양이 사연이와 함께하는 1335번째 밤, 이 밤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품고 고요히 깊어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