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준은 낡은 갈색 가방을 움켜쥐었다. 닳아 해진 손잡이의 촉감은 지난 세월 그가 겪었던 수많은 기약 없는 기다림과 실망의 흔적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달무리 화랑’이라는 간판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번화가에서 비껴난 좁은 골목길,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한 작은 화랑이었다. 최신 정보가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영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믿기지 않게도 확실해 보이는 단서였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희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잊고 있던 붓과 물감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학창 시절, 서영의 스케치북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강렬한 데자뷔에 태준의 손끝이 저릿했다. 문을 열자, 따스하면서도 쓸쓸한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대부분은 풍경화였고, 몇몇은 추상화였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그림들을 훑었다. 서영의 그림체를 찾는 일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과정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의 손길이 과연 예전과 같을까.
화랑 안은 고요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만이 정적을 깼다. 태준은 한참을 헤매다, 가장 구석진 공간에 걸려 있는 작은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은 다름 아닌 낡은 골목길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동네 어귀의 골목, 그곳에 놓여 있던 빛바랜 나무 벤치. 그림 속 벤치의 등받이에는, 태준이 장난스럽게 새겨 넣었던 ‘서영♡태준’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마치 바람에 깎인 흔적처럼.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그림은… 이토록 분명한 단서는… 설마.
“그 그림은… 화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에요.”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태준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갤러리 직원인 듯, 단정하면서도 예술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지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시해 두었지만, 한 번도 팔린 적이 없어요. 작가님이 팔지 못하게 하시거든요.” 지수가 덧붙였다.
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그림을 그린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님은 본명을 쓰지 않으시고, ‘서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세요. 워낙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걸 꺼려 하셔서 저희도 자세히는… 몇 달에 한 번씩 작품만 맡기고 가시곤 해요. 늘 이렇게 깊은 감정을 담은 그림들을 주시죠.”
서연. 서영과 닮은 이름. 태준의 가슴이 다시 격렬하게 울렸다. “그… 작가분은 혹시, 키가 아담하고,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늘 따뜻한 미소를 띠는… 그런 분이신가요?” 태준은 기억 속 서영의 모습을 더듬어 물었다.
지수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자세히 보신 분은 처음인데. 특히 눈매는 정말 똑같아요. 직접 뵌 적은 많지 않지만, 제가 기억하는 ‘서연’ 작가님은 딱 그런 분이세요. 한때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았는데, 요즘은 그림도 더 밝아지고… 최근에 입양한 아이와 함께 계셔서 그런가 봐요.”
입양한 아이. 그 말은 태준의 심장을 다시 한 번 강하게 후려쳤다. 서영에게 아이가 생겼다니. 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질투보다는 복잡한 안도감과 동시에 더 깊은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살아있고,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었다. 거의 확신. 태준은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혹시… 오늘 작가님 오실 예정은 없나요? 꼭 뵙고 싶은데요.” 태준의 목소리가 간절함으로 떨렸다.
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오실 계획이 없다고 하셨는데…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맡긴 그림 중 하나에 문제가 생겨서 오늘 중으로 다시 가져오시겠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밤늦게라도요. 보통은 약속을 잘 안 지키시는데, 이상하게 그 그림만큼은 꼭 다시 가져오라고 하셨거든요.”
태준은 망설임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지고, 화랑의 조명이 더욱 아늑해졌다. 지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차 한 잔을 건넸다. 태준은 그저 골목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렸다. 수십 년의 기다림에 비하면 몇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긴장감은, 어떤 기다림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자정 무렵, 화랑의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태준은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문턱에 선 그림자는 코트와 스카프로 얼굴을 깊이 가리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포장되지 않은 캔버스가 들려 있었다. 그녀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걸음걸이, 어깨선, 심지어 공기 중에 스미는 희미한 향기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수에게 짧게 몇 마디를 건네고, 캔버스를 건넸다. 태준은 입을 열려 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서영아!’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십 년간 수없이 연습했던 그 이름이, 정작 그녀 앞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거나, 혹은 현실이 예상과 너무 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 조각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딸랑.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밤 속으로 사라졌다. 태준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지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분은 늘 그래요. 그림만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지죠.”
태준은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낡았지만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작은 책갈피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섬세한 나뭇잎 모양의 책갈피. 그들의 스무 살 생일에 태준이 직접 골라 선물했던, 그녀가 항상 아끼던 물건이었다. 그때 태준은 깨달았다. 망설였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바로 이 공간에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손안의 책갈피를 꽉 움켜쥐었다. 놓쳐버린 기회,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희망. 강태준은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