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방향을 찾아서
지훈의 손에 들린 낡은 주소록은 습기와 세월의 흔적으로 쭈글거렸다. 잉크는 희미했고, 종이 가장자리는 누렇게 바랬지만, 그 안에 담긴 단 하나의 이름은 여전히 선명한 불꽃처럼 그의 심장을 태웠다. 서연. 서연이라는 이름이 적힌 마지막 흔적을 찾아 그가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 재개발 지구로 지정된 오래된 동네의 낡은 문화센터였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 냄새까지, 모든 것이 마치 서연과의 아련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쓸쓸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15년 전쯤,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김서연’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문화센터의 구석진 사무실에는 백발이 성성한 오미자 여사, 이곳의 마지막 관리인이 앉아 있었다. 돋보기 너머로 지훈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김서연이라… 그 시절에 봉사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요. 이름만으로는 기억이 잘…”
지훈은 작은 배낭에서 낡은 학생증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풋풋하고 해맑게 웃는 여고생의 모습. “이 사람입니다. 스무 살 무렵, 아마 몇 달이라도 짧게라도 봉사를 했을 겁니다.”
오 여사는 사진을 받아 들고 한참을 응시했다. 주름진 미간이 펴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 이 아가씨였군요. 김서연… 아니, 우리는 그냥 ‘서연 씨’라고 불렀죠. 봉사 시간표에 본인의 이름을 적을 때 항상 ‘ㅇ’ 위에 작은 하트를 그렸던 아가씨. 맞죠?”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하트. 서연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알았던 그 사소한 버릇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15년의 세월이 단숨에 무너지는 듯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서연입니다. 혹시… 혹시 서연이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오 여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연 씨는 참 착하고 밝은 아가씨였어요. 누구에게나 웃음을 줬고, 아이들도 무척 따랐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마지막으로 본 건, 그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을 때였을 거예요.”
“병원에요? 무슨 병원이요? 어디가 아팠습니까?” 지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아니, 서연 씨 본인이 아팠던 건 아니었어요. 항상 서연 씨와 붙어 다니던 ‘이미영’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었죠. 서연 씨가 병간호를 한다고 한동안 오지 못했는데, 그 미영 씨가 퇴원하고 얼마 안 돼서 서연 씨도 이 문화센터에서 발길을 뚝 끊었어요. 그 후로 미영 씨도 서연 씨를 찾느라 애를 먹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주 많이요.”
이미영. 새로운 이름이 지훈의 뇌리에 박혔다. 서연이의 친구. 그녀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훈은 애원하듯 물었다. “미영 씨 연락처나 주소 같은 건 없었나요?”
오 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때 묻은 낡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뒤적거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이미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십수 년 전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 주소였을 거예요. 지금은 재개발돼서 다른 건물이 들어섰을지도 모르겠네요.”
희미한 희망이 아득한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재빨리 주소를 받아 적었다. 그러나 그가 막 일어나려 할 때였다.
“아, 그리고…” 오 여사의 목소리가 지훈을 붙잡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을 더듬는 듯했다. “서연 씨는 항상 그 그림을 그렸어요. 이상하게도…”
오 여사는 낡은 봉사자 등록부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서연의 이름 옆, ‘ㅇ’ 위에 그려진 작은 하트 옆에는 손톱만 한 크기로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러진 나침반 같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엉뚱하게도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흐릿하게 그려진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듯, 혹은 의도적으로 방향을 숨기려는 듯한 기이한 그림이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훈은 찢어진 나침반 그림을 응시하며 오싹함을 느꼈다.
오 여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글쎄요. 그저 이상한 버릇인 줄 알았지… 하지만 그게 마지막 날에도 그려져 있었죠. 서연 씨가 마지막으로 서명하고 간 자리에…”
부러진 나침반. 남서쪽을 가리키는 바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연이 남긴 흔적. 15년 만에 발견된 가장 명확하면서도 가장 미스터리한 단서가 지훈의 손에 쥐어졌다. 이미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지훈은 또 다른 미로의 입구에 서 있었다. 과연 부러진 나침반은 서연이 그에게 남긴 비밀스러운 지도일까, 아니면 영원히 헤매야 할 길 잃은 방향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훈은 오래된 문화센터의 문을 나서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불안감과 새로운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서연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