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밤, 고요는 숨죽인 채 온 세상을 감쌌다. 서늘한 공기가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연우의 뺨을 스쳤다. 그는 서재의 낡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펜은 이미 오래전부터 손에서 놓여 있었고, 켜켜이 쌓인 서류들 위로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은 손에 든 낡은 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갈색으로 변색된 종이 위에는 흐릿한 필체가 새겨져 있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에서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밤의 장막을 찢었다. 삑- 하는 짧고도 애잔한 소리는 마치 오래전 그날 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듯했다. 덜컹거리는 밤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수의 눈빛.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찰나의 만남이 평생을 함께할 인연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인연이 이토록 깊은 사랑과 함께,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라는 것을.
연우는 눈을 감았다. 지수와 함께 걸어온 수많은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서로를 지탱했고,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서로의 미소를 보며 다시 일어섰다. 지수는 그의 삶의 이유이자, 어둠 속을 헤맬 때마다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그 등불을 이제 자신이 흔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편지의 내용은 과거의 한 조각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아니, 잊은 척하며 외면하고 있었다고 믿었던 그림자가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늪처럼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늪에 빠지면, 자신은 물론 지수까지도 함께 빨려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연우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때 자신이 좀 더 현명했더라면, 좀 더 신중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지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늘 그의 가장 밝은 면만을 보았고, 그가 애써 감춰왔던 과거의 상처와 실수는 알지 못했다.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순수한 미소가 이 그림자에 의해 조금이라도 희미해지는 것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맞는 길일까. 아니면 지수에게 털어놓고 함께 방법을 찾아야 할까. 그러나 지수의 눈빛에 드리워질 불안과 슬픔을 상상하자, 그는 차마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미 수없이 경험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번이 가장 혹독한 시험이 될 수도 있었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지수의 그림자가 서재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연우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연우 씨?”
지수의 목소리는 새벽녘의 이슬처럼 맑고 고왔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그윽하고 깊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걱정과 함께, 그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수는 그의 눈빛 속에서 파도를 보았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해일 같은 것을. 그녀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일인지 말해주세요.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요. 우리는 함께하는 사람이잖아요.”
함께. 그 단어가 연우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래, 우리는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이 그림자로부터 분리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녀에 대한 배신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지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 모든 평화가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즘 사업이 좀 바빠서 머리가 복잡한 것뿐이에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수는 그의 말을 믿는 척했지만, 그녀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는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다만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을 뿐이었다.
연우는 지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불안한 그의 심장을 달래는 듯했다. 그는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알게 될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결심했다. 이 어둠은 자신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지수가 알아서는 안 될 과거의 빚이라고. 설령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 끝에 빛이 보인다면 그는 기꺼이 걸어가리라.
지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나는 항상 당신 옆에 있을게요.”
그 말에 연우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꽉, 더 꽉. 그녀의 작은 어깨가 그의 커다란 손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순간을 붙잡고, 다가올 폭풍으로부터 그녀를 지켜낼 방법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굳건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기적 소리가 이번에는 더욱 길게, 애절하게 밤하늘을 울렸다. 마치 그의 마음속 울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