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시간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어제의 조각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 것 같은 공허함. 리나는 한적한 찻집의 창가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흐르는 도시의 풍경을 응시했다. 창밖은 수직으로 뻗은 홀로그램 빌딩들과 공중을 가르는 비행체들로 가득한, 눈부시게 발전한 24세기의 서울이었다. 그러나 리나가 앉아 있는 이곳, ‘사색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찻집은 시간을 거슬러 온 듯 고풍스러운 나무와 낡은 천, 은은한 차 향으로 가득했다. 마치 잊혀진 과거의 한 조각처럼.
손끝으로 잔 속의 따뜻한 차를 감쌌다. 온기는 그녀의 피부에 닿았지만,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는 못했다. 기억을 잃은 지 천삼백하고도 스물일곱 번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셀 수 없는 시간선을 떠돌며 수많은 순간들을 경험했지만, 정작 그녀 자신에 대한 기록은 백지 상태였다. 가끔, 아주 가끔, 파편처럼 조각난 영상이나 감각이 스쳐 지나갈 뿐, 온전한 과거의 그림자는 결코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존재는 이렇게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모든 슬픔이, 그녀의 텅 빈 심장을 채우지 못하고 껍데기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찻집 안쪽 구석에서 작고 오래된 오르골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공기를 가르는 듯 애틋하고도 처연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리나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 멜로디는,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녀의 잠재의식 깊숙한 곳에서 늘 희미하게 울리던, 그러나 한 번도 그 실체를 잡아낼 수 없었던 음률이었다.
리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오르골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미한 흙먼지가 쌓인 낡은 나무 오르골 위로, 작은 발레리나 인형이 고통스러운 듯 느리게 돌고 있었다. 멜로디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머금고 있었다. 과거의 잊혀진 강물이 그녀의 정신을 강타하는 듯했다.
…흐릿한 얼굴, 부드러운 손길,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 ‘리나…’
환영이 스쳤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던 감촉, 공기 중에 맴돌던 달콤하고도 아련한 향기,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불리던 그 순간의 안도감. 너무나 생생한 감각이었으나, 눈을 깜빡이는 순간 모든 것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기억의 파편들. 리나는 숨을 헐떡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갈망과 좌절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왜, 왜 모든 것이 이토록 고통스럽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그때, 찻집의 주인인 듯한 노파가 조용히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백발의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노파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지혜와 연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파는 리나의 눈빛에 담긴 깊은 슬픔과 혼란을 알아차린 듯했다.
“이 멜로디가, 아가씨에게도 닿았군요.” 노파는 작게 웃으며 리나의 잔에 따뜻한 차를 더 채워주었다. “아주 오래된 곡이지요. 거의 잊혀진 시대의 노래랍니다.”
리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 곡… 익숙해요. 어딘가에서… 계속 들려왔던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렸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 찻집은 시간을 잊은 이들이 종종 들르는 곳이니. 이 오르골의 주인도 그랬었죠.”
리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격렬하게 뛰었다. “오르골의 주인이라니요?”
“음, 오래전 일이지요. 한 남자였는데… 이 오르골을 늘 가지고 다니곤 했답니다. 이 멜로디를 참 좋아했었어요. 멜로디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늘 말했죠.” 노파의 시선이 멀리, 아득한 과거를 향하는 듯했다. “그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깊고 슬펐어요. 자신을 ‘여행자’라고 소개했지요. 이 오르골을 여기에 맡겨두고 떠났답니다. 다시 찾으러 올 거라고 하면서…”
“여행자…” 리나는 그 단어를 되뇌었다. 자신 또한 그러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늘 말했어요. 자신을 아는 자가 이 멜로디를 듣고 찾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 여행자에게는 자신과 같은 표식이 있을 거라고요.” 노파는 리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가리켰다. 리나의 손목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새겨져 있던,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늘 그녀와 함께했던 유일한 ‘표식’이었다.
노파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마, 당신이 그 여행자인 모양이군요.”
리나는 노파의 말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실마리, 혹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정체성의 조각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텅 비어 있던 가슴 속에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추상적인 감각이 아닌, 실체가 있는 단서.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혼란과 슬픔을 넘어선, 단단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오르골…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리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물었다.
노파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이제 당신이 찾아낼 시간의 조각일 겁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언급했던 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이었어요. 아주 오래된, 그러나 늘 새로운 무언가가 태동하는 곳이라고.”
리나는 조용히 잔금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파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찻집의 문을 열고 나오자, 24세기 서울의 웅장한 소음과 빛이 그녀를 감쌌다. 여전히 기억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표류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아 헤매던 방랑자는, 이제 오르골의 멜로디와 노파의 말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기억을 찾아가는 길, 제1327번째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