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4화

차고 건조한 겨울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윤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쨍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낡은 손수건을 쥐고 있는 손에선 땀이 배어 나왔다. 어제 밤새 뒤척이며 얻어낸 유일한 단서는, 지훈이 오래 전 ‘푸른 서점’이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할머니의 희미한 기억이었다. 도시에 이런 이름의 서점이 아직 남아 있을까 불안했지만, 기적처럼 오래된 건물 틈새에서 낡은 간판이 하윤의 눈에 들어왔다.

서점 안은 퀴퀴하면서도 종이와 잉크 특유의 향이 가득했다. 햇살조차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어둑한 실내에는 먼지 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손때 묻은 책등들이 과거의 시간을 말없이 증명하는 듯했다. 하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책장 사이를 헤매었다. 지훈의 흔적을 찾으려는 간절한 눈빛이 낡은 책들을 훑었다. 그 순간, 한쪽 구석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작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하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차가운 인상을 주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지훈 씨를 아시나요? 혹시 여기서 일했었던… 박지훈 씨요.”

상대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여자는 책을 든 손을 멈추고 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신데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여긴 오래된 서점이에요.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군요.”

하윤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하윤이라고 합니다. 지훈 씨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할머니께서 지훈 씨가 여기서 일했다고 하셔서요. 혹시… 서연 씨 아니신가요?”

여자의 얼굴에서 옅은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서연. 지훈의 여동생이었다. 어릴 적 딱 한 번 본 적 있는 희미한 기억 속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제가 서연인 건 어떻게 아셨죠?” 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지만, 약간의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지훈 씨가 자주 얘기했어요. 푸른 서점에서 일하는 동생이 있다고… 제가 지훈 씨를 만나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혹시 지훈 씨 소식을 아시나요?” 하윤의 목소리에 애원이 담겼다.

서연은 한숨을 쉬며 책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하필이면 이 서점에서…” 그녀는 하윤을 향해 의자를 권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서연의 표정은 복잡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지훈 오빠는… 이제 여기 없어요.” 서연의 목소리는 낮고 가늘게 떨렸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빠가… 어디 아픈 건가요?”

서연은 창밖을 응시했다. 창밖으로는 희뿌연 하늘 아래 회색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오빠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눈꽃이 내리던 그 겨울날, 오빠는… 무언가를 잃었어요. 약속의 증표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했죠.”

하윤의 머릿속에 지훈과의 약속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얀 눈송이가 춤추듯 흩날리던 날,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찾기로 맹세했던 ‘비밀의 보물’.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둘의 꿈과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윤아, 우리가 약속한 보물상자는 이 푸른 서점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야. 우리가 어른이 되면 같이 찾아서 열어보자. 그때까지 이 열쇠를 네가 가지고 있어.’

지훈은 어린 하윤의 손에 낡고 작은 열쇠를 쥐여주었다. 그 열쇠는 지금도 하윤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고, 하윤은 그 약속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지훈이 ‘약속의 증표’를 잃었다니. 그 열쇠가 지훈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까.

“그 약속의 증표가… 혹시 이 열쇠인가요?” 하윤은 목에 걸린 열쇠를 꺼내 서연에게 내밀었다. 낡은 금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서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열쇠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요. 저건 오빠가 지키려 했던 ‘희망’이에요. 오빠가 잃어버린 건… 오빠 자신이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그날 이후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포기했어요. 우리가 함께 살던 집도, 모든 것도 다 놔버렸죠.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저도 몰라요.”

하윤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지훈이 그림을 포기했다니. 그림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던 지훈이, 미래의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던 지훈이…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는 꼭 만나야 해요. 지훈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중요한…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하윤은 필사적이었다.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혹시… 오빠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가요?”

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점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낡은 그림을 가리켰다. 어린 시절 지훈이 그린 그림이었다. 희뿌연 눈밭 위에 두 아이가 서 있고, 그 위로 눈꽃이 흩날리는 그림. 그리고 그림 한쪽 구석에 작게 새겨진 문구.

‘길 잃은 눈꽃이 만개하는 곳에서 다시 만나리.’

“오빠는 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해졌어요.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꾼다고 했죠. 눈 속에서 길을 잃은 자신과…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어요. 그 그림 한 장만 남겨두고요.”

하윤은 그림을 응시했다. 눈꽃이 만개하는 곳. 그곳이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하윤은 문득 그림 속의 눈꽃들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의 눈꽃과 달랐다. 마치… 어떤 특정한 형상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눈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작은 산봉우리나 바위 형상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서연 씨, 이 그림… 혹시 오빠가 이 그림에 숨겨둔 메시지가 뭔지 아세요?”

서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오빠는 가끔 제게 그랬어요. ‘서연아,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눈꽃은 차가운 바위 위에 피어나는 거야. 그곳에 진실이 숨겨져 있어.’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라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차가운 바위 위에 피어나는 눈꽃. 길 잃은 눈꽃이 만개하는 곳. 하윤의 머릿속에 수많은 파편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오래 전 지훈과 함께 비밀 아지트라 불렀던, 도심 외곽의 작은 바위산이 떠올랐다. 그곳은 겨울이면 눈이 가장 먼저 쌓이고, 마지막까지 녹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였구나…” 하윤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서연 씨, 정말 고마워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아요.”

하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은 그런 하윤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는… 어쩌면 당신이 오길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오빠가 많이 변했을 거예요. 그걸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하윤은 서점 문을 나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깥은 어느새 하늘이 더욱 낮아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하윤의 뺨을 스쳤다. 지훈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그가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쩌면 그 바위산에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하윤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때, 첫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작고 차가운 눈꽃이 하윤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의 끝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새로운 눈송이들이 춤추듯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바위산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