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는 잠결에도 촉촉하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어젯밤, 호수 물빛이 그녀의 꿈속을 온통 잠식했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물속에서 애타게 손을 뻗는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를 감싸 안으려 하는 또 다른 그림자. 깨어난 후에도 가슴 한편이 묵직했다. 희미하게 드리운 여명 아래, 마을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회색빛 수묵화처럼 번져 있었다.
몸을 일으킨 수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방을 서성였다. 이곳에 온 후로 매일 밤 꿈에 시달렸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방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에 닿았다. 할머니가 오래된 물건들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이끌리듯 상자를 열자, 먼지 쌓인 천 조각들과 빛바랜 사진들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 드러났다. 작고 섬세하게 조각된 그것은 둥근 형태의 자물쇠 같기도 하고, 작은 함 같기도 했다. 손에 쥐자마자 이상하게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겉면을 살펴보니, 얽히고설킨 넝쿨 무늬 사이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만은 바래지 않았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나무 조각의 이음새를 찾아 열었다. 딸깍, 하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열린 나무 함 안에는 텅 비어 있었다. 실망하려던 찰나, 함 밑바닥에 아주 작고 얇은 종잇조각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스러질 듯 낡은 종이 위에는 희미한 먹으로 쓰인 몇 줄의 글귀가 남아 있었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떼어내 읽었다. 글귀는 마치 오래된 시나 노래 가사처럼 느껴졌다.
<달빛 아래 피어나는 외로움이여,
안개 서린 호수 위로 그림자 지면,
기다림은 별이 되어 길을 잃고,
돌아오지 않는 그대 이름 부르네.>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픈 내용이었다. 이상하게도 글귀를 읽는 순간, 귓가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잊힌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그녀는 곧장 지훈에게 이 나무 함과 종잇조각을 보여주었다. 지훈은 늘 그랬듯이 시큰둥하게 보다가, 나무 함의 조각 무늬를 유심히 살폈다. “이거… 꽤 오래된 물건인데. 이런 조각은 우리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거예요. 할머니도 저런 무늬가 박힌 물건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전설 속 여인이 지니고 다녔다는 작은 함이랑 비슷하다고…”
지훈의 말에 수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설 속 여인이라니? 혹시 연희를 말하는 거야?”
“네, 연희 아가씨가 늘 지니고 다녔다는 작은 함이 있었다고 해요. 그 안에는 첫사랑 도윤 님에게서 받은 마지막 편지가 들어 있었다는데, 호수에 몸을 던진 후로 사라졌다고…” 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빛에도 미약한 동요가 일었다.
두 사람은 그 나무 함과 종잇조각을 들고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함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덜덜 떨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걸 네가 어떻게 찾았니? 연희 아가씨의 ‘달함’이 틀림없어. 오래 전에 호수에 가라앉아 영영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종잇조각에 쓰인 글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것은… 아가씨가 매일 밤 부르던 노래의 한 구절이구나. 도윤 님을 기다리며 부르던 자장가였지. 나도 아가씨 옆에서 어릴 적에 듣고 따라 부르곤 했었는데…” 할머니는 낡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수아가 읽었던 글귀에 이어지는 가사였다.
<달빛 아래 피어나는 외로움이여,
안개 서린 호수 위로 그림자 지면,
기다림은 별이 되어 길을 잃고,
돌아오지 않는 그대 이름 부르네.
은은한 달빛 아래 속삭이는 바람,
메마른 가슴에 스며드는 그리움,
혹여 그대 다시 돌아올까 하여,
나는 오늘도 안개 속을 헤매네.>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수아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이 노래를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혹은 자신이 직접 불러본 적이 있는 듯한 착각이었다. 바깥의 안개는 더욱 짙어져 창문을 뿌옇게 만들었고, 공기 중에는 알 수 없는 냉기가 감돌았다. 할머니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수아의 손을 잡았다.
“이 달함이 다시 나타났다는 건… 연희 아가씨의 혼이 아직도 이 호수를 떠돌며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야. 아가씨는 도윤 님과의 마지막 만남을 약속했던 ‘달그림자 바위’에서 홀로 기다리다 호수로 들어섰지. 그 바위가 아가씨의 마지막 흔적을 품고 있을 거야. 이 노래처럼… 아가씨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수아의 머릿속에 ‘달그림자 바위’라는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잊혀지지 않는 호수 속 그림자와 겹쳐지며,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충동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아를 말리려 했다. “할머니, 안개가 너무 짙어서 위험해요. 게다가 지금은 밤이 아니라… 연희 아가씨가 나타난다고 해도….”
“아가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리움을 찾아 헤매고 있지. 어쩌면 이 달함이 수아 너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할머니는 수아의 손에 닳고 닳은 작은 조약돌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이 돌은 아가씨가 지니고 다니던 물건 중 하나였지. 희미하지만 길을 밝혀줄지도 모르니, 혹시라도 네가 가게 되면 부디 이것을 지니고 가렴.”
수아는 할머니의 말과 조약돌의 온기, 그리고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결국 발길을 돌렸다. “저는…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결심은 단호했다. 지훈은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그녀의 옆에 서기로 했다. “혼자 보내드릴 수는 없죠. 제가 안내할게요.”
짙은 안개 속으로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집을 벗어나자마자, 안개는 더욱 짙어져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훈은 길을 더듬으며 앞장섰고, 수아는 할머니가 주신 조약돌을 꼭 쥐고 그의 뒤를 따랐다. 조약돌은 아무런 빛을 발하지 않았지만, 손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호수 근처에 다다르자, 안개는 걷잡을 수 없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장막 속에서,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수아의 귓가에 울렸다. 할머니가 불러주었던 그 슬픈 자장가였다. 노랫소리는 수아를 홀리는 듯, 달그림자 바위 쪽으로 이끄는 듯했다. 수아는 노랫소리에 홀린 듯 지훈의 손을 뿌리치고 안개 속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수아 씨! 위험해요!” 지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수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노랫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안개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앗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안개의 장막이 순간적으로 걷혔다.
그녀의 눈앞에는 거대한 바위가 호숫가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바위 위에는, 희고 투명한 옷을 입은 여인의 형상이 서 있었다. 그녀는 호수 멀리, 안개 너머의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안개처럼 흐릿했고, 온몸에서 달빛 같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은 희미했지만, 그 애달픈 표정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인의 형상이 수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짙은 안개가 다시 거세게 밀려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노랫소리는 더욱 애절하게 울려 퍼졌고, 수아는 홀로 그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방금 본 것이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