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는 낡은 가죽 지갑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손때 묻은 지갑만큼이나 오래된 사진 속에서 지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좁은 골목길, ‘책 읽는 고양이’라는 간판이 걸린 작은 서점 앞에서였다. 그녀의 손에는 갓 사서 든 듯한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지난 밤, 꿈속에서조차 희미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 서점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우야, 나중에 우리만의 비밀 서점을 찾으면 어떨까? 그곳에서 너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를 읽어줄게.” 그 말은 그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는 마침내 그 서점 앞에 서 있었다. 간판은 여전히 ‘책 읽는 고양이’였다. 다만 글씨는 흐려졌고, 페인트는 벗겨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삐걱이는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커피 향이 뒤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낮은 책장들 사이로 난 복도는 마치 미로 같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실내는 어슴푸레했지만, 정우의 눈은 마치 사냥개처럼 지혜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오래된 책장 속 그림자
“손님, 뭘 찾으세요?”
카운터 뒤에서 돋보기 너머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긴 그녀는 책의 바스락거림처럼 고요했다. 정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몇 년 전쯤… 지혜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이곳에 자주 들렀었나요? 키가 크고, 눈이 참 맑았던…”
할머니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지혜라… 이름이 참 예뻤지. 그 아이라면 기억하지. 한동안 발길이 뜸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왔었네.”
정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얼마 전에? 다시?’ 그는 애써 흥분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정말요? 그럼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무슨 일로 왔었는지 혹시 아시나요?”
할머니는 묵묵히 정우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카운터 아래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지와 펜, 그리고 작은 책갈피들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집어 정우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작고 투박한 압화 책갈피였다. 네 잎 클로버가 정성스럽게 눌려 있었다.
“이건… 지혜가 남기고 간 거야.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걸 꼭 그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했지.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보였지.”
정우는 떨리는 손으로 책갈피를 받아 들었다. 어릴 적, 지혜와 함께 풀밭을 헤치며 네 잎 클로버를 찾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클로버를 찾아내곤 했다. “정우야, 이것 봐! 행운은 숨어있는 곳에 있는 거래. 잘 찾아보면 꼭 찾을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그는 책갈피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클로버의 줄기 부분에 아주 작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손톱만 한 글씨는 흐릿했지만, 그의 눈은 그것을 정확히 읽어냈다. ‘오후 3시, 추억의 호수.’
“할머니, 지혜가 이 책갈피 외에 또 다른 말은 남기지 않았나요?” 정우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음… ‘이 서점은 항상 나를 기다려줄 거야’라는 말을 했던 것 같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고도 했지.” 할머니는 기억을 더듬으며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즐겨 찾던 시집 한 권이 있었는데… 항상 그 책을 읽으며 창가에 앉아 있었어.”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서점 안쪽, 창가에 놓인 낡은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권의 시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시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시집의 표지에는 ‘사랑을 잃은 자에게’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시집을 펼치자, 마지막 페이지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추억의 호수, 그리고 새로운 실마리
‘정우에게. 내가 정말 사라져 버린다면… 이 호수로 와줘.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석양을 기억하니? 그 순간이 나의 마지막 꿈이었어. – 지혜.’
글씨는 지혜의 것이 분명했다. 떨리는 손으로 시집을 덮으며 정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왜 이런 메시지를 남긴 것일까? 사라져 버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추억의 호수’는 어디일까?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오후 3시, 추억의 호수.’ 클로버에 새겨진 시간과 장소는 더 이상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가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였다. 동시에,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정우는 급히 몸을 돌려 서점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지만, 그의 심장은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추억의 호수는 그들의 모교 근처에 있던 작은 인공 호수였다. 그곳에서 둘은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손을 잡았던 곳도, 첫 입맞춤을 나누었던 곳도 그 호숫가였다. 그러나 ‘오후 3시’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2시 45분. 서점에서 호수까지는 차로 족히 3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정우는 무작정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그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액셀을 밟았다. 지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는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그녀의 메시지가 마치 그의 영혼을 관통하는 듯했다.
‘지혜야, 제발… 무사해야 해.’
시간은 마치 끈적한 물엿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로 접어들자, 차들은 거북이걸음이었다. 신호등은 그에게 끊임없이 붉은 빛을 내보냈다. 그의 눈앞에는 지혜의 웃는 얼굴과, 클로버에 새겨진 절박한 메시지가 교차했다. 그녀의 그림자 드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보였다는 할머니의 말이 뇌리에 박혔다.
오후 3시 정각. 정우의 차는 겨우 호숫가 주차장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수 중앙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과… 그 배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었다. 햇살이 그녀의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지혜!”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여인은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햇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우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였다. 그의 잃어버린 첫사랑, 지혜.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슬프고 공허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배 위에서 다른 그림자가 불쑥 솟아 올랐다. 한 남자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는 모습이 정우의 눈에 들어왔다.
“지혜야! 안 돼!”
정우는 미친 듯이 호숫가를 향해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혜는 그를 향해 무언가 애타게 소리치는 듯했지만,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남자는 지혜를 밀쳐냈다. 지혜의 몸이 마치 나뭇잎처럼 휘청이며 차가운 호수 속으로 떨어졌다.
“지혜!!!!!!”
정우의 절규가 호수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앞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녀가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