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7화

김현우는 낡은 수첩에서 찢어져 나온 듯한, 잉크가 번진 쪽지를 다시 한번 펼쳐 들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주소는 ‘별수다락방, 해질녘 골목 17번지’였다. 익명의 제보자가 보낸 봉투 안에는 이 쪽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밤새 이 주소를 구글 지도에 입력하고 또 입력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울렸다. 어쩌면, 어쩌면 이지아와 관련된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그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해질녘 골목이라…”

현우는 닳고 닳은 탐정수첩을 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도시의 복잡한 지도에는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잊힌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오래된 구시가지 골목을 헤매기 시작했다. 재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은, 마치 지아와의 추억처럼 색이 바래고 낡은 건물들로 가득했다.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이발관 간판,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로 삐걱이는 미싱 소리가 들려오는 양장점. 그렇게 좁은 골목을 한참 걷다가, 그는 굽이진 길 끝에서 아주 작은 나무 간판을 발견했다. 낡은 글씨로 ‘별수다락방’이라고 쓰여 있었다. 간판 아래로는 허름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순간 현우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맞았다. 분명 이곳이었다.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현우는 망설임 없이 철문을 두드렸다. 낡은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한참을 두드려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싶던 찰나, 문틈 사이로 좁은 눈길이 그를 살폈다. 이윽고 빗장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시오?”

작은 틈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깊게 파인 주름과 날카로운 눈매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지아의 눈매와 닮은 것도 같아 현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현우라고 합니다. 혹시… 이지아 씨에 대해 여쭤볼 수 있을까요?”

지아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노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현우는 놓치지 않았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문을 활짝 열고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내부는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유화 물감 냄새가 뒤섞인 공기, 벽 가득 걸려 있는 수많은 그림들, 그리고 캔버스 조각들과 붓, 물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작업대. 마치 시간이 멈춘 예술가의 공간 같았다.

“앉으시오.”

노인은 한쪽 구석의 낡은 의자를 가리켰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노인은 탁자에 놓인 찻잔 두 개에 뜨거운 보리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리차를 건네받으며 현우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탐정입니다. 오래전…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지아 씨입니다.”

노인은 고요히 차를 마시며 현우의 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현우는 초조해졌다. 과연 이 사람이 지아에 대해 알고 있을까. 혹은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해줄까.

“지아… 오래된 이름이군.”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당신을 찾으라 했나?”

“아닙니다. 제가… 제가 지아를 찾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놓아버렸던 소중한 인연이라서요.”

현우는 자신의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인은 한참을 현우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이곳에서 한동안 지냈었지.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하던 아이였어. 아픔을 그림으로 토해내던 아이였지.”

노인의 말에 현우의 가슴이 아려왔다.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동안 지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왜 모든 색을 잃었다고 했을까. 현우는 자신이 떠난 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간절한 궁금증에 목이 탔다.

“그 아이는… 왜 갑자기 사라졌던 건가요? 그리고 이곳에는… 왜…” 현우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노인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아이는 이곳에서 새로운 숨을 쉬었고, 새로운 길을 찾았어. 아픔을 딛고 일어섰지.”

그때, 노인의 시선이 한쪽 벽에 걸린 그림으로 향했다. 현우도 시선을 따라갔다.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유독 그의 눈길을 끄는 한 폭의 그림이 있었다. 짙은 푸른색과 회색조의 풍경화. 언뜻 보면 평범한 그림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우울하고도 강렬한 에너지는 현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붓 터치, 색감,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슬픔. 현우는 그림 앞에서 얼어붙었다.

“이 그림… 지아가 그린 겁니까?”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이곳을 떠나기 전, 내게 남긴 그림 중 하나지. 그 아이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어. 자세히 보게.”

현우는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그림 속 풍경은 희미하게 바다가 보이는 절벽이었다. 짙푸른 바다 위로 파도가 부서지고, 그 위로는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현우는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림의 한구석,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 꽃은 일반적인 꽃과는 달랐다. 잎사귀 하나, 꽃잎 하나, 줄기 하나까지도 어딘가 익숙한 형태였다.

그 순간, 현우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지아가 그의 손을 잡고 풀밭을 달리며 보여주었던 특별한 꽃. 그녀는 그 꽃을 보며 항상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 그림 속의 꽃은, 지아와 현우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표식이었다. 그들의 추억이 담긴, 그들만의 암호였다.

“이건…” 현우는 그림 속 꽃에 손을 뻗었다. 그 꽃잎 아래, 아주 작게 그려진 또 다른 그림자가 보였다. 어떤 기호 같은 것이었다. 마치 약도를 그리듯, 점과 선으로 이어진 표식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는 아이였어. 어쩌면…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현우는 그림 속의 기호를 면밀히 관찰했다. 복잡한 선들은 이내 하나의 지도를 형성하는 듯했다. 마치 다음 목적지를 알려주는 듯한 암호. 그는 수첩을 꺼내 재빨리 그 기호를 옮겨 그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지아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림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단서를 남기고 있었다.

“지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현우는 다급하게 물었다. 노인이 그녀의 현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그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그늘 아래 살고 있어. 자신을 감추고, 숨 쉬며 살아가고 있지. 자네가 너무 깊이 파고들면… 그 아이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네.”

“위험이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아이의 그림을 찾는 사람이 자네뿐만이 아니었어. 아주 집요하고, 위험한 자들이 있었지. 그 그림들 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는 자들. 지아는 그들에게서 도망치려 했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을지도 몰라. 자네의 추적이 그 아이를 다시 그들에게 노출시킬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게.”

노인의 경고에 현우의 등골에 한기가 스쳤다. 단순한 재회라고 생각했던 그의 여정에, 예상치 못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아는 왜 그림 속에 비밀을 숨겼을까? 그녀를 쫓는 위험한 자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현우는 그림 속의 기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가슴에 새겼다. 이제 그는 단순한 첫사랑을 찾는 탐정이 아니었다. 지아를 둘러싼 위험한 비밀을 파헤치고, 그녀를 보호해야 할 임무를 띠게 된 것이다. 그는 노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별수다락방’을 나섰다.

해질녘 골목을 벗어나자, 도시의 불빛이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 불빛들이 더 이상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 속에 숨겨진 지아의 암호와 노인의 경고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단서는 지아가 남긴 그림 속의 암호, 그리고 그녀가 새롭게 활동하는 예술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지만, 그에게는 오직 지아라는 별 하나만이 보였다. 이제 그 별을 따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둠 속으로, 그리고 위험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