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7화

오래된 책갈피의 속삭임

김준호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심장이 묵직한 돌덩이를 매단 듯했다. 지난 6화에서 발견된, 윤서영의 낡은 시집 속 빛바랜 책갈피. 그 위에 희미하게 적혀 있던 작은 동네 서점 이름 ‘책갈피와 커피잔’. 단순한 단서였지만, 그에게는 메마른 사막에 떨어진 한 방울의 생수와 같았다. 수많은 허탕과 절망 끝에 찾아낸, 어쩌면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손은 운전대를 쥔 채 희미하게 떨렸다.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소도시, 그의 내비게이션은 도심을 벗어나 구불구불한 좁은 길로 그를 안내했다. 길가에는 키 작은 들꽃들이 아무렇게나 피어 있었고, 낡은 담벼락 위로는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풍경 속에서, 준호는 자신이 서영의 시간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렸다.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나타나는, 낡았지만 아늑해 보이는 건물. ‘책갈피와 커피잔’이라는 나무 간판이 따스한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오래된 책 냄새와 은은한 커피 향이 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낮은 목소리의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고,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이 방문객을 묵묵히 맞아주었다. 한쪽 벽면에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창가 테이블에는 몇몇 손님들이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돋보기를 쓴 채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인자한 눈매가 어딘가 서영의 차분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여사님 되시나요?”

할머니는 뜨개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세월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네, 제가 한선희입니다만. 어떤 일로 오셨어요?”

준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혹시… 오래전에 이 근처에 살았던 윤서영이라는 아이를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서영이의 먼 친척인데, 연락이 닿지 않아 수소문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는 지갑에서 조심스럽게 서영의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십대 시절, 맑게 웃고 있는 서영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한여사님은 사진을 받아 들고 돋보기 너머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의 서영

“서영이… 아, 서영이. 윤서영. 내가 이 동네에서 서점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이 작은 가게의 단골이 되어주었던 아이였지.” 한여사님은 아련한 추억을 더듬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용하고, 책을 정말 좋아했어. 특히 시집을 자주 빌려 가곤 했지. 늘 무언가 사색하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는데… 착하고 마음 여린 아이였어.”

준호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이 서영의 존재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서영이가 마지막으로 이 동네에 있었던 게 벌써… 한 10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한여사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때쯤… 서영이네 집에 좀 힘든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아버님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지. 서영이도 그때 많이 지쳐 보였어. 한동안 서점에 와서도 말없이 앉아 책만 읽다가 가곤 했지. 예전처럼 활짝 웃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어.”

준호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가 서영을 잃어버린 그 시간에도, 서영은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목을 졸랐다.

“그때 서영이가 자주 가던 곳이 있었는데…” 한여사님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산골 작업실’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어. 한 노화가 분이 은둔하며 그림을 그리시던 곳이었지. 서영이가 그곳에 가서 많이 위로를 받는다고 했었어. 언젠가 나에게 그랬지. ‘선생님, 저 잠시 거기 가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제 자신을 찾을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이야.”

준호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구체적인 단서였다. 그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산골 작업실이요? 혹시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한여사님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거기가… 좀 찾기 어려운 곳인데. 그리고 서영이가 그곳에서 자신을 찾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으니… 그 아이를 그냥 두는 게 맞을까 싶기도 하고.”

그녀의 말은 준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서영이 그를 피하는 것일까? 그를 잊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알릴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서영이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지, 괜찮은 건지,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준호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의 목소리는 애원과 절박함으로 가득했다.

한여사님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을 꿰뚫어보려는 듯이.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그 아이가 많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아두게. 세월의 흐름은 사람을 참 많이도 바꾸어 놓으니까.”

산골 작업실, 그리고…

한여사님은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더니, 낡은 수첩 하나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수첩에서 한 장을 찢어내어 연필로 대략적인 지도를 그려주었다. 굽이진 산길과 작은 다리, 그리고 외딴 오두막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나와. 꽤 깊숙한 곳이니, 해 지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거야. 차는 여기까지 가져왔나?”

“네, 가게 앞에 세워뒀습니다.”

그녀는 지도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서영이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맡긴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누군가 자기를 찾아오면, 이걸 꼭 전해달라고 했지. 그 아이의 부탁이 있었으니, 자네에게 맡기겠네.”

작은 상자 안에는 빛바랜 책갈피 하나가 고이 놓여 있었다. 마른 꽃잎이 한 송이 눌려 박혀 있는, 아주 작은 책갈피였다. 준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익숙한 향이 아주 희미하게 풍겨왔다. 이것은… 서영이 예전에 직접 만들어서 그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들의 비밀 장소에서 함께 꽃을 따 모아 만들었던 그 책갈피.

눈물이 핑 돌았다. 서영은 자신을 잊지 않았던 걸까? 혹시 그가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오래된 추억을 담아두고 싶었던 것일까?

준호는 한여사님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부디… 서영이를 찾거든, 그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말아 주게.” 한여사님의 걱정 어린 당부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아이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혼자 지냈으니… 아마 많이 여위었을 거야.”

준호는 책갈피와 지도를 든 채 서점을 나섰다. 따스하던 햇살은 어느새 기울어지고 있었다. 손 안의 작은 책갈피는 잊혀진 시간의 속삭임을 전하는 듯했다. 산골 작업실. 그곳에 가면 서영이 있을까? 아니, 서영은 그곳에 ‘있었을까’? 그리고 그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지도를 펼쳐 들자, 굽이진 산길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채, 준호는 다시 미지의 길로 향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 퍼즐 조각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조각이 어떤 그림을 완성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