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덮고도, 지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뻑뻑한 마분지 표지를 쓰다듬는 손길에 할머니의 손때 묻은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제 읽었던 첫 장의 글귀들이 눈꺼풀 안에서 춤을 추듯 아른거렸다. 그녀가 알던, 늘 잔소리를 하면서도 따뜻한 밥을 차려주던 할머니의 모습은 일기장 속 소녀와 너무나도 달랐다. 억압받고, 꿈을 꾸고, 아픔을 겪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 깊이를 헤아리기도 전에 지아의 마음은 이미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꿈속에서조차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낡은 한옥의 서까래 아래, 수줍게 웃던 소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새벽녘, 고요한 방에 앉아 지아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1968년 5월 12일, 맑음. 그리고 흐림.

순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한옥의 흙벽은 언제나 차가웠고, 그 위에 걸린 달력은 5월의 싱그러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순영의 마음은 5월의 햇살처럼 밝지 못했다. 아침부터 어머니의 꾸지람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여자가 재봉틀이나 제대로 배울 것이지, 맨날 책만 들여다보면 쌀이 나오니 밥이 나오니?”

어머니는 순영이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여자에게는 시집가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며, 그 전에는 살림과 바느질 기술이나 익히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 하지만 순영의 마음속에는 책 속의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넓은 세상을 누비고, 시 속의 단어들처럼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감나무 잎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그 아래에는 작은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제 저녁, 순영은 마을 어귀의 작은 도서관에서 태수 오빠를 만났다. 늘 말없이 책을 읽던 그의 옆모습은 왠지 모르게 애틋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슬쩍 보았던가. 그가 고개를 들자, 순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순영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순영아, 이 책 읽어봤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순영의 귓가에 울렸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건넨 책은 낯선 제목이었지만, 그의 손길이 닿았던 페이지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순영은 고개를 숙인 채 겨우 대답했다. “아니요, 오빠.”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읽어보면 좋을 거야. 네가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잖아.”

그리고는 책갈피 하나를 꺼내 순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낡았지만 잘 다듬어진 나무 책갈피였다. 작은 글씨로 ‘사랑은 고독 속에서 피어나네’라고 새겨져 있었다. 순영은 책갈피를 꽉 쥐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태수 오빠의 미소와 책갈피의 온기만이 남은 것 같았다.

그의 눈빛 속에서 순영은 꿈을 보았다. 그녀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유와 지성으로 가득 찬 미래의 희미한 윤곽을. 태수 오빠는 서울의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그에게는 세상이 넓고, 기회가 많았다. 순영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의 꾸지람은 더욱 날카롭게 순영의 심장을 찔렀다. “태수 그 아이와 어울리지 마라.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공부만 해서는 배를 채울 수 없는 법이다. 너는 그저 좋은 가문에 시집이나 가면 되는 것이야.”

어머니의 말은 차가운 현실의 벽이었다. 낡은 한복 치마를 매만지며 순영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도 태수 오빠처럼,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 외침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 뿐, 결코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책갈피를 쥐고, 그 위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일 뿐이었다. ‘사랑은 고독 속에서 피어나네.’ 어쩌면 나의 사랑도, 나의 꿈도, 영원히 고독 속에 갇혀 피어나지 못할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일기장 속 순영의 이야기는 거기서 잠시 멈춰 있었다. 지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알던 할머니는 늘 강하고, 현실적이며, 억척스러운 분이었다. 살림 솜씨가 좋고, 늘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분. 그런 할머니에게, 이렇게나 순수하고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이 있었다니. 그것도 감히 ‘꿈’을 꾸던 지성적인 사랑이라니.

지아는 방 한편에 놓인 낡은 사진첩을 들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젊은 할머니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때의 할머니는 앳된 얼굴로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지아가 알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 두 분은 환하게 웃고 계셨지만, 지아는 사진 속 할머니의 눈빛에서 어딘가 모를 쓸쓸함을 읽어내는 듯했다.

‘태수 오빠…’

그 이름 세 글자가 지아의 입술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태수 오빠와는 어떻게 헤어지고, 할아버지와는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된 걸까?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했을까?

지아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다음 장에는 다른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아의 심장을 더욱 격렬하게 울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