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산등성이는 온통 불타는 듯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난밤 내린 서리 탓인지 공기는 한층 더 투명하고 차가웠다. 하나와 진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할아버지가 남긴 두 번째 단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새벽 이슬이 맺히는 곳’을 따라온 길이었다. 발밑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 푹신했지만, 이따금 미끄러운 바위가 숨어있어 한 발 한 발 조심해야 했다.
진수가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할아버지의 보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렇게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야 한다니, 정말 대단한 보물인가 봐.”
하나는 그의 말에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께는 늘 보물 같은 것들이 많았잖아. 진정한 보물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는 건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몰라.” 그녀의 시선은 숲의 깊은 곳, 유난히 굵고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에 닿아 있었다. 그 나무는 다른 단풍나무들 사이에서도 위엄 있게 서 있었고, 가지마다 매달린 노란 잎사귀들은 햇빛에 부서져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침내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나무뿌리 사이, 이끼 낀 돌 틈에 낡고 작은 나무 상자가 끼워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상자였다. 진수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들자,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상자 위에는 조각칼로 새겨진 듯한 작은 참새 문양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찾았어! 드디어 찾았어, 하나야!” 진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이 교차했다. 이 상자 안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어떤 단서가 숨어 있을까?
상자를 열자, 안에서는 또 다른 작은 나무 조각 하나와 빛바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나무 조각은 정교하게 깎인 작은 비둘기 모양이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오르려는 듯한 형상이었다. 하나는 비둘기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서 할아버지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진수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얇은 한지 위에는 할아버지 특유의 흘려 쓴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깊은 산중, 눈물 흐르는 곳에
다섯 수호신이 지키고 서니
그 안에서 길을 묻거라
날개 달린 전령이 이끄는 대로
두 사람은 종이에 쓰인 글귀를 번갈아 읽었다. “깊은 산중, 눈물 흐르는 곳… 폭포를 말하는 걸까?” 하나가 중얼거렸다. “다섯 수호신이라니? 다섯 개의 큰 나무?”
진수는 비둘기 조각을 유심히 바라봤다. “날개 달린 전령이 이끄는 대로… 이 비둘기 조각이 다음 단서인가 봐. 이걸 어디에 써야 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이제는 목적지가 조금 더 분명해진 기분이었다. ‘눈물 흐르는 곳’이라면 아마도 폭포일 것이고, ‘다섯 수호신’은 주변의 크고 오래된 나무들을 의미할 터였다. 숲은 그들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끄는 듯했다. 단풍으로 뒤덮인 숲은 마치 살아있는 미로 같았다. 붉고 노란 잎들이 햇빛을 가려 길을 찾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은 점점 더 가팔라지고 숲은 더욱 울창해졌다. 거친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스치고, 발밑의 돌들은 이따금 미끄러워 넘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다. 진수가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말했다. “하아, 정말이지 할아버지는 우리를 꽤나 고생시키시는군. 이쯤 되면 슬슬 지치는데.”
하나는 피곤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괜찮아, 진수야. 거의 다 온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잖아. 진정한 보물은 얻으려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거라고. 힘내자!” 그녀는 지친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고, 진수는 그 손을 잡고 다시 한번 힘을 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웅장한 물소리였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폭포 소리야!”
물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숲은 더욱 습해지고, 이끼 낀 바위들이 많아졌다. 이윽고 숲의 끝자락, 거대한 바위 절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바위 절벽에서 은빛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작은 폭포였지만, 짙은 붉은 단풍나무들 사이에서 떨어지는 그 모습은 마치 산이 흘리는 눈물처럼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폭포 주변에는 과연, 다섯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가 마치 폭포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다른 단풍나무들과는 달리 푸른 기운을 잃지 않고 굳건히 서서, 붉고 노란 숲의 한가운데서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다섯 수호신’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나는 비둘기 조각을 꼭 쥐었다. “이제 어디를 봐야 할까?”
진수는 폭포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 가까이, 축축한 이끼와 미끄러운 바위들을 헤치고 나아가던 진수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폭포수가 만들어낸 작은 물웅덩이 옆, 거대한 바위틈 사이에 무언가 인위적인 것이 보였다. 녹슨 철문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반쯤 흙에 묻힌 작은 철문이었다. 문 위에는 묘하게 비둘기 조각의 크기와 딱 맞는 듯한 동그란 홈이 파여 있었다.
“이거야, 하나야! 여기 봐!” 진수의 외침에 하나는 다급히 달려갔다. 그들의 눈은 철문과 그 위에 파인 홈에 동시에 닿았다. 하나는 손에 쥐고 있던 비둘기 조각을 조심스럽게 홈에 맞춰보았다. 놀랍게도, 비둘기 조각은 마치 원래 제자리인 것처럼 정확하게 그 홈에 끼워졌다. 작은 조각이 홈에 맞춰지자, 낡은 철문에서 오래된 기계음 같은 둔탁한 소리가 ‘덜컹’하고 울렸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아주 조금, 미미하게 열렸다.
좁고 어두운 틈새로 스며든 가을 햇살은 그 안을 비추지 못했다. 그 너머에는 어떤 비밀이, 어떤 할아버지의 진정한 보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둠 속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는 오래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과 미지의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하나와 진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장은 이제 막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드디어, 보물의 입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진짜 탐험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만 같았다.
